허무주의와 죽음에 대한 사유
나는 오래전부터 허무주의적인 생각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려 왔다. 이 생각은 고등학교 1학년 때(2017년) 처음 했었고 작년(2024년)에 들어서 극에 달했다. 작년에 휴학을 해서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서 일까 이러한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단순히 허무주의에 굴복하지만은 않고 항상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함께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정말로 무의미 하다는 것을 떨칠 수가 없어 힘이 들때가 많았다. 그리고 여전히 이 것을 생각한다.
시간을 붙잡고 싶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씩 없어져간다는 건 참으로 슬프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언젠가는 반드시 이별해야 한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별할 일도 없는데 괜히 태어나서 힘들게 됐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태어나 버렸다는 뜻이고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 모든 것과 이별해야한다. 그래서 시간을 붙잡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공간은 붙잡을수라도 있는데 시간은 붙잡을 수도 없이 흘러가버린다. 몇 년전부터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가 두려워졌다. 시작은 곧 필연적으로 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시작한 이상 우리는 이별해야한다. 결국 모든게 변하고 없어진다. 남는게 뭘까? 우릴 누가 기억이나 할까? 나는 내 증조할머니,할아버지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 몇 세대 후면 내 후손들도 내 존재를 모르고 잘 살아갈 것이다(그나마 성공적으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가정하에). 다 말하기도 입아픈 정말 많은 무의미한 일들이 있다. 난 누군가 무슨 일을 했다고 얘기하면 어떤거든 사실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반박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우리 삶을 곰곰히 살펴보자. 삶을 찬찬히 한번 분석해보면 생각보다 정말 남는게 정말 없다. (시간을 하루 통째로 내어서 이것을 생각해보길 권장함.) 도대체 남는게 뭘까? 영원한건 뭐지? 오랜 고민 끝에 내 결론은 내가 자식을 낳아 유전자를 남기면 그나마 내 유전자 절반은 남길 수 있다. 사실 이것도 반영구적이다.
나는 현대사회가 굉장히 바빠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목적을 잃었고 존재의 의미를 묻지 않은채 살아간다. 컨텐츠가 넘쳐나지만 마음속은 왠지 공허하다. 지금은 그야말로 대공허의 시대다. 나는 현대사회의 정말 많은 일이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이 부분은 따로 나중에 글로 정리할 것이다). 책 [가짜노동]에서도 나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나는 심지어 그 책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강하게 가짜노동이 많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도대체 살면서 무엇을 해야될까?
나는 생명의 가혹함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 책을 읽는데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너무나 잔인한 자연앞에 있는 동물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사실 족제비도 그저 자신의 새끼를 먹여 살려야 했을 뿐이었다. 호스피스 병동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을 지 모르겠다. 호스피스 병동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들이 가는 곳이다. 이 곳에서 죽음은 너무나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 죽어야 끝나는 우리의 인생이 슬펐다. 그리고 나는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쇼펜하우어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나비효과라는 영화가 있다(정말 명작이다). 그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때 마다 다른 선택을 하는데 그 것이 나비효과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일련의 사건후 주인공은 마지막에 가장 어린 시절로 돌아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어쩌면 태어나지 않는것이 가장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이 영화의 엔딩이 이해가 됐다.
나는 죽음과 허무주의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나는 삶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서 도무지 죽음을 마주하고 싶지가 않다. 이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 이 허무주의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허무주의의 극복이라는 글로 따로 적으려한다. 한가지를 얘기하고싶다. 이런 어렵고 귀찮은 질문을 계속 회피하는 것으로는 허무주의를 피할 수 없다. 우리는 허무주의를 인정하고 마주보고 서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