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본질과 한계(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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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편집하여 각각의 주제로 다시 포스팅할 예정임

서문

목차

  1.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인식론적, 인지과학적 분석을 통한 인지의 한계 (자연주의적/피론주의적 입장/이데아론)

  2. 지식의 본질과 특성 2-1. 언어의 본질과 특성 언어의 탄생, 언어에 대한 고찰

2-2. 앎, 지식, 이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식-상대주의적 입장, 인류원리와 진화론적 사고, 관찰의 이론적재성과 모델 의존적 실재론)

  1.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구성해야 할까? 3-1. 논리적 언어로서의 수학의 필요성(논리실증주의적 입장)

3-2. 세상을 이해하는 물리학적 방법론 물리학을 통한 지식의 구성, 과학적 방법론(귀추), 과학이란 무엇인가?

  1. 수학과 물리학의 한계, 인간의 필연적 한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 (극단적 회의주의적 입장)

  2. 과학철학적 고찰 -양자역학의 철학과 측정의 문제 (전자는 관측 전에 ‘실재’하는가?) -상대성이론과 우주론에 대한 철학 -시간이란 무엇인가? -생물학과 뇌 과학에 대한 철학(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수리철학 -역사적해석의 오류(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포퍼의 반증주의) -통일장 이론, 모든 것의 이론 -과학과 종교

  3. 형이상학과 존재론 존재란 무엇인가? 무엇이 존재하는가? 우주와 생명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왜 존재하는가? 신/보편자 논쟁과 종교 정신/물질 논쟁

  4.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 자유의지는 환상이다! 너무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 의식의 메카니즘, 우리는 정말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가?

  5.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낙관적 허무주의, 니체의 초인사상,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한 ‘사랑’

-이 글에 대한 비판과 반론
-철학적 논의에 영감을 주는 영화들




  1.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에대한 인식론적, 인지과학적 분석을 통한 인지와 지각의 한계

우리의 뇌는 처리과정에서 너무나 쉽게 정보를 왜곡한다.”The brain”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의 뇌가 얼마나 세상을 잘못이해하는지에 알 수있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 특정한 필터를 거치면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왜곡이 되는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왜곡은 우리 내적의 심리적,정서적인 것, 또는 배경지식,환경, 기억에 따라 달라지는 것,또는 착시현상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이라던가, 로르샤흐 검사라던가, 선택편향 확증편향, 인지편향 같은 심리적인 작용에 의한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도 많은 왜곡을 수반하지만 기계장치를 이용한다거나 우리가 특정방식으로 인식하는 법을 훈련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런것들이 아니고 우리가 감각체계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의 극복할수 없는 필연적인 본질적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한번 앞을 바라보자. 앞에 보이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알수있다고 장담할 수있는가? 우리는 그 물체가 반사한 빛을 시각정보로 받아들여 뇌속에서 재구성한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앞에있는 빨간 사과를 보자. 사과가 빨갛다는 지식이 확실한가? 파란색 불빛으로 사과를 비추면 사과가 보랏빛으로 보일 것이다. 살짝 옆으로 이동해서 사과를 보자 그럼 우리가 보는 사과의 모습은 크기와 모양이 조금 달라져 보일것이다. 당신이 보는 사과의 모습은 과연 확실한가? 우리가 감각경험을 통해 받아들이는 지식은 절대적이지 않다. 이러한 생각은 옛날부터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피론주의자(pyrrhonist)들이 그러하다. 피론주의자들은 강한 회의주의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우리가 어떠한 지식도 정확히 알 수없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인식을 통해 현실의 그림자를 파악할뿐이며 관념적 표상을 머리속에 구성한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사실이야말로 존재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며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 우리는 절대로 본질을 그 자체 그대로 파악할 수 없고 본질의 감각소여(소리,색깔 등)를 통해서만 인지할수 있다. 순수한 형태 그대로를 파악하는 법은 없다. 그런방법은 인지되지 않는 것이다. 순수한 실재 그대로를 파악하는 방법은 인식을 하는 주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면 된다. 그럼 어떤한 필터도 없이 그대로를 보게 될것이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아무것도 알수없는 주체다. 인지되기위해선 특정방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지과정이 없는데 어떻게 인지될 수 있겠는가. 필연적으로 어떠한 필터를 거쳐야만 우리에게 인식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특정방식은 현실을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과정에 따라 변형된 표상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예를들면, 우리는 물체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물체가 반사한 빛을 보는 것이다. 또, 우리가 물체를 만지는 것은 착각이다. 원자간의 반발력으로 절대 만질수 없고 만진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특징을 인지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듣는다 라는 인지과정도 살펴보자. 허파에서 공기가 나온다 성대가 진동한다 성대의 진동이 공기매질의 변화로 종파로 전달된다 귀에 들어온다 달팽이관을 울린다 청각신경세포를 통해 뇌로 이동한다 반복된 패턴이 시냅스의 연결을 늘리고 뇌에 기억된다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소리가 실재하는 것처럼 느낀다 본다라는 인지과정을 살펴보자. 인간의 감각중 가장큰 영향을 끼치는 시각이 인지되는 방식을 뇌과학적으로 자세하게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세상을 잘못인지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빛이 반사되고 각막과 수정체에서 굴절되어 망막에 맺힌다.~~~ 색깔이란 무엇인가 본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절대 동시에 볼수없다. 광속의 제한이 있다. 우리는 항상 과거를 본다.

사피엔스종의 특이한 감각체계의 필터로 현실을 구성한다. 우연한 진화적 산물로 인한 특정한 감각체계를 통해 외부환경을 인식한다. 우리가 만약 가시광선을 이용한 방법이 아니라 우연히 다른감각 체계를 통해 외부를 인식하는 생물 종 이었다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는 것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즉 지식은 생물 종에 따라 상대적이다. 고양이는 세상을 어떻게 볼까? 고양이는 맛을 못느낀다는데 “이 김치찌개는 짜다”라는 지식은 과연 절대적인가? 빨간색과 초록색을 태생적으로 구분못하는 생물종에게 “빨갛다”라는 지식은 확실한가? 인간의 인식은 진화과정에서 유용하기 때문에 선택된 도구에 불과하다. 원래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우리는 감각과 의식이 허용하고있는 경험의 범위 내에서 세상에 대한 모델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식될수 없는 것, 느낄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채로 살아간다. 무엇이든지 인지 되기위해선 하나의 표상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한다.

애초에 우리의 관찰이란 외부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뇌로부터 변형된 감각 이미지이다. 뇌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가공된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뇌는 생각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복잡한 다세포가 생기며 운동을 컨트롤할수있는 원시 신경세포가 생기고 이것이 진화를 거듭해 뇌가 된다. 뇌는 그저 생존을 위해 만들어졌다. 감각을 통해 현실처럼보이는 우리 머릿속안의 환상이 있을뿐이다. 우리는 각자의 뇌속에 창조된 허상의 세계를 살고있다. 인식은 생명현상이 발명해낸 것이다! 우리는 그저 주위환경과 자극에 반응할 뿐이다. 우리는 인지체계의 감옥안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하는 현상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가 만약 가시광선대역 파장의 전자기파가 아닌 다른 방식의 인지체계를 가진 생물종이라면(자외선 파장대만을 인지한다던가 등)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들은 지금과 훨씬 달라졌을것이다. 지금 우리주위에도 자외선 적외선 등 다양한 파장의 빛이 떠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가시광선을 통해서만 시각정보를 얻을수있다. 만약 우연히 자외선 파장대를 이용한 생물 종이었다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현실을 보게 될것이다. 자외선이나 적외선등은 우리눈에 보이지 않을뿐 지금 우리 주위에도 존재한다.

시각장애인, 시청각장애인의 사례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어떠한방식으로 머릿속에 세상을 인식할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또한 물체를 측정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연적 오차가 수반된다. 물체를 측정하는 것또한 상호작용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 맛을 측정하기위해선 반드시 조금이라도 아이스크림을 건드려야한다. 완전히 어떤 교란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측정하는 것은 없다(참고로 이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아니다). 단순히 본다는 과정조차도 미시적으로 살펴보면 교란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언가를 온전히 그대로 인식한다는 과정은 불가능하다.

즉 요약하면, 1.측정과정에서 필연적 오차(불확정성원리와 관련없음) 어떤 오차도 없이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스크림 맛을 보기위해선 조금이라도 아이스크림을 핥아야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오차를 수반한다.

2.인지한다는 것은 특정방식으로 우리의 뇌속에 정보가 전달된다는 것이고 특정방식은 현실을 그대로 표상하는것이 아닌 변형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현실의 그림자를 볼 뿐이다.

  1. 어떤 감각체계를 통해 인지하느냐에 따라 인지과정이 달라질 것이고 만약 우리가다른 감각체계를가진 생물종이었다면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들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식에대한 종-상대주의적 관점이라고한다.

  2. 물체를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 아닌 감각소여(예컨데 물체가 아니고 물체에 반사된 빛)를 인지하는 것이다. 현실을 온전히 그대로 표상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학적 실재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관념적 표상만을 본다.

따라서 객관적 실재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실재를 명확히 볼수는 없는 없고 관념적 표상만을 얻을 뿐이다. 마치 깜깜한 동굴속을 더듬거리며 동굴을 모양을 추리하는 것과 같고 코끼리의 다리, 코, 꼬리를 각각만지면서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유추하는 것과 같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어항 밖의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어떤 창을 통해 창밖의 세상을 본다. 어항 속 물고기는 어항의 모양에 따라 다르게 굴절된 빛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가 우리의 세계의 한계다.

플라톤 동굴의 비유가 매우 좋은 비유이다. 우리는 동굴속에서 횃불에 비친 현실의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동굴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 즉 이데아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를 명확히 바라볼 수 없고 근사적으로만 바라볼 뿐이다.현실은 우리의 신체적조건에 의해 제한된 특정한 방식으로 밖에 인식될 수 없다. 우리는 인지체계 덕에 세상을 인식하고 머릿속에 현실을 구상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그것은 생각의 감옥과도 같은 것이다.

결론 :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류의 물음에는 답할 수 없고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하는 현상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뇌 속에 구성한 세계는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를 그린 그림이다. 관념은 실물의 대리인일 뿐이다.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견해 인식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나의 인식론에 대한 주장에서 나는 단어의 뜻을 엄밀히 정의하는 식의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재론 관념론 합리론 경험론 토대론 정합론 같이 본래 철학의 전통적 인식론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을 사용하거나 언어적으로 명확히 하는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고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립관점에서 살펴보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으로 구분된 인식론적 입장은 오히려 우리의 사고를 편협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재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고 어떤 관념적인 표상을 얻을 뿐이라는 느낌을 이해했으면 한다. 나는 주로 뇌 과학과 인지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해 인식의 한계를 지적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자연주의 인식론이라 부른다. 현대에 들어서 생긴 자연주의 인식론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고 인지하는 과정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자연주의 인식론을 제창한 사람은 콰인(W.V.Quine)이 있으며 그는 “Epistemology Naturalized”에서 전통적 인식론의 한계를 지적했으며 자연과학의 한 부분으로 인식론을 전환하려고 한다. 나 또한 인식론에 관한 논의에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접근하였다.

  1. 지식의 본질 2-1. 언어의 본질과 특성 언어의 탄생, 언어의 발전 과정

문법적으로 맞는 말이라도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 많다. 단어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며,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맥락에따라 어떤 의미를 지칭하도록 기능할뿐이다. 러셀은 ‘기술이론’에서 언어는 사태를 기술하는 불완전한 기호일 뿐이라고 하였다. 🍎 를 사과라고 부르면 이것은 우리가 🍎 를 지칭하기 위해 언어로 추상화된 기호를 나타낸 것뿐이다. 이 것을 가지고 “사과가 존재하는가?, 사과란 무엇인가?”같은 논쟁은 무의미하다. 원자들이 모여 어떤 물체를 이루는 것이고 변할수도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그것을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해 편의상 부르는 것을 가지고 언어가 지칭하는 것이나 고유명사가 뭐니하는 언어철학은 비효율적이다. (언어는 이토록 불명확하지만 어쨋든 잘 기능하고 의사소통을 가능케한다) 언어의 기원과 발달 인간의 뇌가 조금씩 발달하고 소통을 위해 언어가 필요해졌다. 특정 상황에선 이렇게 말하고 다른 상황에선 저렇게 말하고 이것이 기억되고 패턴화되고 여러 인간이 따라 사용하여서 관습적으로 쓰이면서 언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바벨탑신화? 언어행동주의 언어의 출현과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모텐 크리스티안센과 닉 채터의 저서 ‘진화하는 언어’에서 주장하는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아기가 태어나고 빛을 통해 세상을 인지한다. 어떤 다른것과 구분되는 일정한 시각적 자극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꾸 동일하게 ‘검은색’ 이라는 말을 한다. 아기는 자연스레 그 단어를 기억하고 다음번에 동일한 자극이 들어왔을때 자기도 ‘검은색’이라고 따라 말한다. 우리는 커가면서 익숙해지고 ‘검은색’이라는 단어가 원래있었고 완전한거 같이 느낀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 우리가 소리(공기매질의 진동)의 패턴에 의미부여를 하고 익숙해 진것이며, 시각적으로 검은색과 흰색의 구분에 특정한 기호와 패턴을 약속하고 의미부여 한 것이다.

언어와 사고는 관념적표상과 기호,심볼을 통해 추상화된다. 언어는 세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또한 동시에 언어는 사고의 근본이자 생각의 감옥이다.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다. 언어는 강력한 추상화의 도구이자 동시에 우리의 한계다. 문자 또는 문자의 소리,즉 말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표현할 수 있게함과 동시에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는 강력한 울타리이다. 만약 우리가 더 나은 표현방법을 찾는다해도 결국 그것은 또 다른 울타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무엇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그 문제를 언어로 치환한다(그래야만 탐구할수있다). 하지만 치환하는 동시에 그 관념에 갇혀 본질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언어의 문법구조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제한짓는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단어내에서만 세상을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고 형식적으로 인정된 문법구조내에서만 문장을 쓸 수있다. 언어라는 추상화를 통해 세상을 표현할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명확한 한계를 정한다.이것을 보고 하이젠버그는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했다. 그 어떤 표현방식도 표현방식임과 동시에 그것의 필연적 한계를 내포한다. 지금 나의 모든 생각과 논증도 언어라는 감옥안에서 이루어지고있다.우리가 어떤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선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 언어가 있기에 우리가 생각도 할 수있고 소통을 통해 우리가 이만큼 발전할 수있었다고 생각된다. 언어가 있기에 생각도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추상화할수 있으니까.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수있는 단어는 제한적이기에 우리는 그 안에 갇혀 빠져나올 수없고,또 언어로 인해 답이 없는 무의미 하지만 그럴듯한 수많은 형이상학적 명제들이 생겨난다. 본질을 알지 못한채로 그 주위를 빙빙 돌뿐이다.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본래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생존과정에서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의사소통체계일 뿐이다. 세상을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기에 완벽한도구는 아니다. 외국에 살면서 외국어를 쓰면서 본인의 생각이나 기치관이 변했던 경험이 있는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 달라진다.

2-2. 무엇인가를 “안다”,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통적 인식론에서는 ‘안다’, ‘지식’ 이라는 것이 어떤것인지 연구한다. 일반적으로 지식이라는 것을 ‘정당화된 참된 믿음(Justified True Beilf,이하 JTB)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철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정의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논의를 전개하며 인식의 과정을 밝히려 한다. 자연주의 인식론에서와 같이 인지과학적 방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수있다. ‘안다’는 것은 “안다”라는 단어의 글자형상 기호가 우리의 시각에 인지되고 이것이 뇌세포로 전달되고 반복적으로 이러한 자극이 입력되면 익숙해지게 되어 우리는 ‘안다’는 단어의 뜻을 안다고 생각한다.

<인류원리적,진화론적 사고> ~니까 ~인것이다(당연하게 생각해보기) >인류원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하자. 진화론적 사고는 정말 아주 상식적인 방식이다. 어째서 기적적인 확률로 인간처럼 고등한 의식을가진 존재가 태어났을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확률이든 높은확률이든 이미 우리가 존재하므로 이미 100퍼센트의 확률이고 그렇기에 우리가 이런질문을 할 수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을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확률이100퍼센트이다. 진화론적 방식으로 사고하는 방식은 단순히 생물학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아주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인류원리,진화론과 같은 방법론으로 사고해보자. 우리가 왜 이렇게 생겼을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이 생존에 적합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존해 있고 생존해있기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은 생존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조차 할 수없다. 모든 생물이 생존에 적합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생물은 생존해 있지 않을것이기 때문에 생존하는 모든 생물은 생존에 적합하게 행동할 것이다.

훈련소에서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인류의 위대한 인물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세계에 살고있다. 그런 세계에서는 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조차 인지할수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런세계에 살고있다. 그런일이 안일어났으면 어떡할까 고민할 필요없다. 우리는 이미 그런일이 안일어난 세상에 살고있고있기때문에 그것의존재조차 모르는 것이다.

영화 소스코드 마지막 장면

치킨이 없는 시대에 치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Aviation regulation is written in blood. 옛날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지금의 안전이 가능했다. 그냥 처음부터 가능했던것은 없다. 처음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치킨이 없는 시대에 치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번 사고를 겪고나면 그때 대비를 한다. 당연한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니 욕하지 마라. 다음부터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안전한 것은 그 전에 이미 사건이 있었기때문에 안전한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수많은 사건이 예방된채로 지내고있다. 그런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우리가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치킨이 없는 시대에 치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구지하철참사 때문에 수많은 다른 지하철참사가 예방되었다.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걸 인지하겠는가.

로또맞은 사람들을 모아놓은 로또마을에서 어떻게 로또맞았냐고 물어보니 기적적으로 운이 좋았어라고 대답하는게 아니라 여기가 로또마을이니까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총이 고장나면 사형수가 죽지않을수 있다 만약 어떤 사형수가 총이 고장나서 오발돼 살아났다고 하자. 사형수는 자신에게 기적이 있어났다 생각할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적은확률로 총이 고장나서 지금까지는 잘 발사되다가 이제 한번 고장날때쯤이 되긴했다. 그래서 한번 고장난건데 살아난 사형수는 자신이 기적이라 생각한다. 총이 고장나지 않아 죽은 사람은 이런생각도 못한다 충분히 일어날법한 일인데 살아남은 사형수는 자신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화살을 쏘고나서 과녁을 그리면 언제든 엑스턴을 맞출 수있다

내가 존재하기에 (내가 지각하는)세상이 존재한다.

존재 자체로 존재의 이유는 증명된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려고 할것이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적이기에 논리적으로 완전하면서 존재론에 대한 대답을 준다.

총알을 맞은 전투기가 전투에서 돌아왔다. 사람들은 당연히 전투기의 총알자국이 많은 곳을 보강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총알자국이 없는 날개를 보강해야 한다. 역설적이게 총알자국이 있는 날개를 보완하면 안된다. 총알자국이 있다는 것은 총알을 맞았음에도 살아돌아왔다는 것이다. 총알자국이 없는 곳은 총알을 맞아서 돌아오기 전에 폭발해 전투기가 추락했기 때문에 총알자국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총알자국이 없는 곳이 취약한 부분이다. 역설적이게도 총알자국이 없는 곳을 오히려 보완해야 한다.

역사의 Whig interpretation : 어떤 일이 일어난후에 보니까 마치 그전의 모든 일이 그 일을 위해서 일어났던것같이 느끼는 착각

<대부분의 지식은="" 어떤사실을="" 그저="" 분류하고="" 이름붙인것에="" 불과하다=""> 지식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 사소한 개념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예컨데 화학결합에서 전자친화도라는 개념을 도입할때 이 개념은 좀더 편리한 현상분석을 위해 도입한 것일뿐 곧이곧대로 외우고 암기할 필요없다. 본래 근본적인 관점으로보자면 전자가 퍼텐셜에너지가 낮은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화학자들이 보다 편리하게 분석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지식,분류체계는 인간이 이름을 붙이고 추상화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집착할필요도 없다. 지식의 대부분은 그저 추상화이고 분류일뿐이다. 그런의미에서 거의 모든 학문은 표기법의 학문이다. 물리학도 마찬가지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물리학은 자연현상에 표기법을 붙인것 뿐이다. 대부분의 지식은 현상을 분류하고 이름붙인것에 불과하다. <"이해한다" 라는 의미> 자연법칙은 원래 우리의 직관과 맞지않다. '이해한다'는 단어는 잘못됐다. 미터단위세계에 사는 우리는 양자역학의 확률적해석을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양자세계에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초기조건이 주어지고 작용하는 힘을알면 미래를 전부예측할수 있다는 것을 굉장히 이상하게 여길것이다. 원자가 작다는 표현은 잘못됐다. 생명체를 이루기 위해선 무수히 많은 원자가 보여 복잡한 체계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이런생각을 하는 우리는 당연히 원자보다 훨씬크고 원자가 작다느끼는 것이다. 원자가 작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고등한 뇌가 필요하고 무수한 원자의 집합이 모여 큰 개체를 이룰때 가능하므로 원자가 작은 것은 당연한것이다. 원자의 행동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상한 것은 우리다. <☆관찰의 이론적재성과 모델 의존적 실재론> 관찰가능한 물리량이란 무엇인가. '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본래 궁극의 진리같은 것은 없다. 질량이라는 양은 중력이론이 의해 생겨난 개념이다. 질량은 중력이론이 결정하고 전하는 전자기 이론이 결정한다. 정해진 것은 없으므로 무엇을 관찰할지 어떤구조로 세상을 바라볼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특정사건을 서술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의 좌표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이를 기술하는 기본적 틀을 만든다. 물리학은 기본적으로 시공간의 프레임 속에서 논리를 전개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인식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하다. 언어에서도 시제 라는 개념은 중요하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만들고 특정한 값을 할당해줌으로써 정확한 사건을 기술할수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언어를 통해 현상을 추상화하여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다. 관찰이란 무엇인가 이론이 무엇을 관찰할지 결정한다,아인슈타인의 생각(관찰의 이론적재성) 스티븐 호킹의 모델 의존적 실재론과도 유사하다. 우리가 실재라고 여기는 것들은 이론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어항 속 물고기이고 우리의 인지체계가 어항의 모양이다. 어항 속 물고기는 어항이 네모 모양일때와 어항이 세모 모양일때 보이는 바깥세상이 다를 것이다. 어항의 모양이 실재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실재에 대한 관념적 표상만을 알 수 있고 사물의 참된 본질이 아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표상되는가 하는 현상을 기술한다. 표상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을 통해 인지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현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가 '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자하는 방식으로 안다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인지체계를 가진 외계생명체는 우리와 사뭇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할 것이다. 인지체계를 통해 세상을 인식할 수있음과 동시에 그것은 편향된 필터이며 동시에 우리의 강력한 한계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지체계가 만들어낸 감옥 속에서 현실을 구성한다. 세상을 어떤방식으로 바라볼 것인가? 관찰의 이론 적재성의 한계, 순환논증의 오류 관찰의 이론적재성의 필연성 관찰의 이론적재성은 핸슨이 처음주장했고 내 주장의 맥락과는 다소 다르지만 이글에서 관찰의 이론적재성이란 단어를 쓰겠다. 열역학은 거시계의 복잡한 양상에대한 관찰의 이론적재성을 가진다. 열역학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것은 개개의 분자의 운동방정식을구해 시간에따라 궤적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물분자 개개의 쌍극자 모멘트를 구해서 그것이 만들어 내는 총 전기장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구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모른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건 거시적인 물리량이다. 어떤 이론인지에 따라 무엇을 알고자 하는지가 달라진다. 논리철학논고에 나오는 명제와 상당히 유사한 느낌인데,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고 사실의 총체이다. 사물을 묘사하는 이론,논리적 사실그림이다. 시간,공간,질량,전하같은 근본적인 개념도 선험적 지식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이다. 우리의 이론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우리가 자연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이다. 질량은 중력이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고 전하는 전자기 이론이 결정한다. 우리가 얻고자하는건 무엇인가? 관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용적인 답을주는 해석은 무엇인가? 등의 이러한 질문들을 바탕으로 이론을 창의적으로 구성하자 입이없다면 말, 언어는 있는가? 시각이 없다면 문자는 있는가? 펜과 노트가 없다면 수학은 있을 수 있는가? 학문은 있을 수 있는가? 추상화의 강력함, 어렴풋한 것을 추상화시켜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유용하다. <지식의 한계=""> 2차원세계는 3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듯 우리도 마찬가지다. 1차원에선 넓이라는 개념을 절대 이해할수 없다 3차원은 2차원에 시간축을 더하여 인지할 수 있다. 다른차원도 비슷하게 인지된다 n차원 존재는 한번에n-1차원만 볼 수 있다. 인간은 인지체계상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4차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에 수학전 추상화를 통해 표현할수는 있다. 수학의 강력한 장점이다. 3차원정육면체는 2차원 평면 전개도를통해 이해될수있다. 인간의 경험은 한계가 있으므로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자. 3차원세계사람이 구를 위아래로 움직이면 2차원세계사람은 원이 커졌다 작아지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3차원세계에서는 공을 든것인데 계속들면 2차원세계에서는 공이사라졌다고 느낄수도 있다. 인간은 마치 2차원세계의 존재이고 3차원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2차원에서 3차원 좌표축을 생각해보자 그것들이 실제 90도 인가? 아니다 120도 정도 된다. 이 것을 그냥 우리가 90도라고 믿는 것이다. 4차원도 추상적으로 믿으면 된다. '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본래 궁극의 지식같은건 없다. 참인 것을 찾고싶다면 우리가 그것을 참이라고 정해주면 된다. 지식을 구성하는 방법에는 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참된 지식,궁극의 지식 따위란 없으며 인간이 지어낸 환상에 불과하고 우리는 실재가 아닌 현상을 기술하는 이론체계를 가질뿐이다.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것이고 지식이란 무엇인가하는 인식론적 물음은 매우중요하다. 나는 외계 지적생명체는 어떤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지 무척 궁금하다. -선험적 지식의 오류 칸트 비판철학이나 아펠의 선험화용론 따위에서 제시하는 선험적인 지식(선험적인 인식의 구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이다. 시간과 공간같은 개념또한 인간이 소통을 위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일뿐이다. 우리가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구조가있어야 언어적활동을 가능케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시간이나 공간은 경험과 독립적으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지식, 즉 a priori 가 아니다. -생물학자들의 서술방식에 대한 비판 ~을 위해서 세포가 ~를 한다 따위의 서술은 잘못되었다. 그저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며 그것이 생존에 적합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건이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마치 생명을 위하는듯이 행동하는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개별세포는 개체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을 위해서 라는 표현을 통해 목적론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은 고쳐져야 한다. 그렇기때문에 '몸에 상처가 나면 몸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한다' 같은 류의 설명이나 미토콘드리아가 세포활동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ATP)를 생성한다 라는 류의 설명은 논리적으로 잘못되었다. -역사학자들의 서술방식에 대한 비판 우리가 직접 그것을 본것이 아니고 기록을 통해 재구성한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략적인 모습만 알 뿐이다. 완벽히 객관적으로 서술되는 방식은 없다. 역사라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누군가의 관점으로 쓰여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텍스트로 접하면서 공부를 할때 굉장히 그럴듯하면서도 비효율적이다. 사람들은 알아도 막상달라지는게 없다. 사실이 아니라 의의를 되새기는게 중요한 것이다. 현실과의 괴리감 -사회학에 대한 비판 사회학은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효율적, 당연한 것에 이름을 붙이고 굳이 복잡하게 생각한다. -School kills creativity 교육이 오히려 사고를 제한한다. 어떤 지식을 가르쳐주면 그 특정 사고방식에 갇혀 그 안에서 밖에 생각할수 밖에 없다. 어떤 방법을 알려주면 자꾸 그 틀안에서만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 편견없이 선지식 없이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미존재하는 지식이 사고의 틀을 제한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을때 다양한 창의적인 의견이 나올수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도 전에 특정방법을 가르쳐줌으로써 우리의 사고에 크나큰 제한이 생기게 된다. 어떤 한 방법을 알려주면 우리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 방법안에서만 갇혀 생각하게 되버린다. 지식을 습득하기 전에 반드시 본인 스스로 생각해보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그 어떤 선입견과 편견도 없이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한다. 교육이 오히려 사고를 제한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로막고 창의력을 제한한다. 올바른 교육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야한다. 학교가 창의성을 죽인다. 분류를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생각을 제한짓는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분류를 한 것일뿐 이러한 분류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3.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구성해야 할까? 3-1.일상 언어의 한계와 논리적 언어로서의 수학의 필요성.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논리실증주의적 입장) 분석철학의 바이블로 언급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나오는 마지막 명제를 인용하겠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한다." 문제는 언어다. 언어란 감옥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자유란 무엇인가,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의 목표인 물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류의 본질을 탐구하는 목표나 현상너머의 사물의 참된 본질을 찾는 과정은 동의하지만 그 것은 반드시 수학적으로만 전개되어야 하고 물리학적 방법론을 통한 것이어야 할것이다. 철학은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하고 언어의 한계때문에 완전할수없다. 단어의 의미같은것을 쫒다보면 결국 우리는 단어를 완벽하게 정의하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것이다. 단어들끼리 순환적으로 정의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완벽히 정의할수도 결론 내릴수도 없는 것이다. 굉장히 본질적인 개념들 을 나타내는 단어들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기호체계를 가지고 논리적 언어를 만들자. 복잡한유기체덩어리가 의미부여한 일상언어의존성을 탈피하고, 기호를 이용해 논리적 언어를 구성하자. 대륙철학으로 대변되는 철학은 대부분 내생각에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특히 논리실증주의에 대항하여 생겨난 현대철학사조중 하나인 현상학(phenomenology)에 관한 것은 정말 헛소리들 뿐이라 생각한다.정답을 내릴수없는 논의이다. 참 거짓,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의미를 토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단어들은, 그런 단어들을 포함해 기술하는 명제들 사이에 관계들을 나타내는 역할과 우리가 할수있는것과 할 수없는것을 구분할뿐이다. 소쉬르는 그의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는 그 스스로 무엇을 지시할 수 없고, 단지 자신과 다른 기호와 의미의 분기 또는 차이를 만듦으로써 지시한다고 설명한다. 엄밀하게 정의된 개념도 아니고 그럴수도 없다. 정답도 없고 앞으로 정답을 찾지 못할것이다. 무의미한 토론이다. 언어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나는 엄청나게 많은 철학적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수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한다. 20세기초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기존의 철학적 방법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이 생겨났고 슐리크,카르납,라이헨바흐와 같은 오스트리아의 빈 학파를 중심으로 수학적사고와 과학적방법론을 중요시하는 논리실증주의/논리경험주의가 전개되었다. 나 역시 논리경험주의적 태도를 계승하였다. 오직 검증가능한 과학적 진술들 및 논리학이나 수학 등의 논리적으로 동어반복적인 진술들을 통한 논증만이 유의미하다. 전통적인 철학적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명제는 경험적나 실험적으로나 검증가능하지도, 수학처럼 논리적으로 동어반복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현대 분석철학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있다고 본다. 논리적 언어의 사용에만 중점을 맞추고 경험적인 증명을 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전통적 논리실증주의적 입장과 조금 다르다. 먼저 종합명제와 분석명제의 구분을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종합명제가 과학적명제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밀한 규칙을 정할필요는 굳이 없다. 논리실증주의는 결국 물리학을 하면 되는 것이다. 3-2. 세상을 이해하는 물리학적 방법론, 물리학이란 무엇인가? physics is not metaphysics 물리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물리학은 귀추적이다. 인식의 한계,지식의 본질 등을 탐구하였고 논리실증주의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들을 바탕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지식을 구성하여야 할까? 위의 논의들을 바탕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봐야할지 생각해보자. 답은 바로 물리학적 방법론이다. 물리학의 정의 : 과학 또는 물리학에서 적용해야하는 유일한 방법은 없으며 새롭고 창의력있는 방식으로 논증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학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해 답을 해보도록 하겠다. 호모사피엔스 생물종의 뇌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인지 수준에서 수학이라는 자연의 언어를 이용해 자연현상이'어떻게'작동하는지('왜'가 아니고'어떻게'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설명하는 환원주의적, 보편적 이론체계를 근사적으로 구축하는 학문,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이름을 기가막히게 훌륭하게 지었다. 절대적 진리를 찾는것이 아니라 모든현상을 기술하는 방법론,이론체계를 찾는것. 물리학은 환원주의 즉, 보다 단순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복잡한 현상도 알고보면 단순한 법칙에 의해 설명될수있다고 가정한다. 가장 단순화하여 설명한다는 것은 물리학이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핵심적 특성이다. 오컴의 면도날법칙이다. 최상의 설명은 가장 단순한 설명이다. 물론 단순함도 중요하지만 합리적사고과정을 간과하면 안된다. 단순함만 추구하다보면 비합리적인 결과를 얻을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어떤편견도 없이 생각하도록 노력하자.(히캄의 격언, 환자는 모든 병을 가질수 있다) 물리학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연현상을 실험사실에 의존해 다룬다. 물리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형이하학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실험적 증명이 뒤따라야한다. 이론과 실험이 대립한다면 폐기되어야 할 것은 이론이다. 여기서 나는 관찰이란용어대신 실험이라는 용어를 쓸 것이다. 관찰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가시광선파장대의 전자기파를 이용한 시각정보에만 크게 의존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또 감각은 정확하지 않고 주관적이다. 또 관측보다는 수학적 이론모델이 중요하다. 관측할때는 지구가 정지해있고 태양이 도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하지만 태양주위를 지구가 도는 것이 합리적이다. 맹목적으로 관찰만하면안된다. Physics is not metaphysics. 물리학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다. 실재를 묘사한 그림이다. 모든 과학이 그렇다. 과학이론은 도구이지 신조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특이한 시각이다. 이 시각은 상상이상으로 놀라운 통찰을 준다.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를 그린 그림이다. 비유를 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이다.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실, 즉 사물을 묘사하는 논리적 사실그림이다. 물리학은 자연현상을 수학적 추상화를 통해 그린 그림이다. 실재 그 자체를 파악할수는 없다. 실체를 묘사하는 논리적 그림이 있을뿐이다. 현실의 그림자를 통해 합리적인 근사이론을 구축한다. 자연의 이면에 숨겨진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찾아낸다. 자연현상 이면에 숨겨진 보다 근본적인 이론체계를 만든다. 물리학은 기본적으로 예전의 이론체계의 개념적 틀안에서 발전한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고전역학적 개념(운동량, 에너지)등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이다. 경험적,실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귀납적 추론을 통해 가설을 만들고 연역적 형식으로 이론체계를 만든다. 이러한 논증방식을 귀추적(abductive)또는 실험적 연역법이라고 한다. ☆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1. 내용은 경험적,실험적으로 증명가능한 것이고 2. 형식은 공리체계를 통해 연역적이고 수학적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3. 가장 간단한 원리로부터 가능한 모든현상을 설명하는 환원주의적 방식을 사용한다. 즉 오컴의 면도날 법칙을 따른다. 4. 이를 바탕으로 자연 현상에 대한 추상적 이론체계를 통해 자연현상을 기술한다. 이론체계는 수학적으로 간결하고 우아할수록 좋다. 이러한 이론체계는 자연현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축한 이론일 뿐이며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를 그린 그림이다. 실험적 검증에서는 반복적으로 동일한 조건에서 같은 결과를 내야한다.(과학실험의 재현가능성)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대한 진리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자. 그림은 수학적으로 간결하고 우아한 것일수록 좋다. (예컨데 코페르니쿠스의 행성모델) 이것이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이다. 물리학 이론은 실재와 우리의 인식사이의 연결고리이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결합으로도 볼 수있다. 귀납과 연역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이론을 구축한다. 뉴턴역학의 공리도 귀납을통해 유추한 것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고 유클리드 기하학의 제5 공리 평행선 공리가 수정되었듯, 일반상대성이론이 나오고 뉴턴의 중력이론이 수정되어 공리가 수정되듯 실험적인 사실에 비추어 적절히 공리를 수정해줘야한다. 노이라트의 정합론에 대한 배를 수리하며 항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완전한 연역은 없으며 반드시 귀납의 영향을 받는다. 뉴턴역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을때도 비슷한 과정이 일어났다. 연역법에서의 공리는 출발점이기 이전에 도착점이다. 개별사례에서도 성립하게끔 일반화원리 즉 공리를 적절히 의도적으로 정해준 것이다. "출발점이기 이전에 도착점" 이라는 문장을 곱씹어보길 바란다. 이러한 것을 귀추적(abductive)이라고 한다. 뉴턴도 프린키피아에서 이러한 철학적 관점을 시사하였다. Hypotheses non fingo 실험결과를 설명하는 가설을 만들고 연역체계로 작성한다. 올바른 예측과 실험사실이 가설의 정당성을 보증한다. 우리는 어떠한 물리학 이론체계가 틀렸음을 확신할 수있지만 결코 완전히 옳음을 확신할수는 없다. 어떤 이론에 반하는 관찰자료가 없고 올바른 예측을 할 때 우리는 근사적으로 옳다고 여길것이다. There is a theory which states that if ever anyone discovers exactly what the Universe is for and why it is here, it will instantly disappear and be replaced by something even more bizarre and inexplicable. There is another theory which states that this has already happened. – Douglas Adams – 4. 수학과 물리학의 한계, 지식의 한계, 인간의 필연적 한계 (극단적 회의주의적 입장) <우리가 인지조차="" 못하는="" 것들=""> 이 세계가 가상현실이라면? 우리는 환상만 보고 우리는 그것을 인지조차 못한다면? 우리의 창조목적이 외계인이 한것이라면? 개미가 인간의 세상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똑같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프로메테우스,에일리언,매트릭스 <지식의 한계=""> 수학 역시 마찬가지로 훌륭한 추상화의 도구이자 동시에 우리의 한계이다. 모든 도구는 효율적 수단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편견이다. 이 것은 필연적 결과이다. 인지,지각을 하는 한 색안경을 벗는 완벽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역시 근본적으로 파고들어가면 의문의 여지가 남아있다. 허나 수학은 집합론, 추상대수학과 같은 분야를 통해 굉장히 엄밀하고 논리의 구조가 탄탄하다. 하지만 온전히 수학만을 이용해서 자연현상을 기술할 수는 없다. 수학을 주로 이용해야하지만 우리의 이해를 위해 일상언어도 사용하여야 한다. 과학은 결국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쓰는 일상언어를 사용한 설명은 불가피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물리학책은 일상언어는 한줄도 적혀있지 않고 전부 수학식으로만 써져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물리학은 여러분야로 나뉜다. 각각의 현상을 기술하기 위한 유효이론이 존재한다.그 영역내에서는 참이다. 물리학도 앞서 설명햇듯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는 현상을 기술한것이다.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를 그린 그림이다. 따라서 물리학은 근사적이다. 체스룰을 모른 채 체스경기를 관찰하면서 체스의 규칙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영화 시작 10분후에 입장해서 영화의 뒷부분을 보고 앞내용을 추리하는 것과 같다. 평생앞을본적없는 시각장애인이 '색'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하는것과 같다. 많은 지적인 노력끝에 합리적인 예측을 할 수 있지만 절대로 완벽하게 알아낼수는 없을것이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전통적인 철학의 방법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이생겨났고 수학과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세상을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논리적언어인 수학을 통한 논의전개와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자는 철학사조를 논리실증주의라 한다. 논리실증주의 역시 여러 비판과 한계가 있다. 논리실증주의자인 콰인도 "Two dogma of empiricism "라는 논문에서 논리실증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수학이 아닌 다른 방법도 마찬가지로 훌륭한 도구이자 동시에 필연적 한계를 내포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수학을 통해 세상을 봐야한다. 그것이 근사적일지라도 인류의 모든 학문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큰 통찰을 준다. 수학은 놀라울 정도로 우주를 정확히 예측하는 아주 유용한 언어다. 또한 수학을 오래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수학이 얼마나 아름답고 유용한지 알 것이다. 나는 지금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언어로 내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그 자체로 순환논리이며 자기 모순적이다. 그렇기에 내 생각도 완벽하지 않다. 물리학 없는 수학은 공허하고 물리학 없는 철학은 무의미하다. 물리나 수학은 잘 닦인 고속도로가 아니다. 낯선황무지를 개척하는 여행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기도 한다. 물리학은 절대로 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궁극의 지식도 아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이해할수있는 환원주의적 방식으로 기술하는 것 뿐이다. 모델의존적 실재론에서 언급했듯 진리는 상대적이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스스로 생각하라 아버지는 매우 부드럽게 어떤 것이 사실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직 진실만이 비판을 견딜 수 있다고요. “자신에게, 그리고 권위 있는 다른 이들의 생각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게 될 거야.” –칼 세이건의 딸 샤샤 세이건 <왜 물리학인가?>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상상속의 질서를 설명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긴 우주역사에서 아주 잠시 인류의 행동양식을 지배하는 사회 시스템일 뿐이다. 유통기한이 짧은 지식이다. 근본법칙도 아니다. 예컨데 수요공급법칙 물리학이 가장 거시적 관점,근본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형이상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반드시 물리학적 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물리학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실재를 합리적으로 묘사하는 인간이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귀납의 문제=""> 물리법칙에도 귀납의 한계가 있지만 큰 상관은 없다.(중력이 지구에서 작용한다고 해서 달에서도 작용할 것인가? 같은 질문) 왜냐하면 물리학의 기본전제가 간단한 자연법칙이 온 우주의 자연현상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기때문이다. 반박할 거리는 없다. 그저 우리의 믿음이다. 세상은 간단한 환원주의적 법칙에 의해 모든것이 설명될수 있다는 믿음. 자연현상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신념이 있기때문에 자연현상에서는 귀납의 문제가 문제되지않는다. 모든 현상은 간단한 환원주의적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 개별원자 또는 세포에 의해 작동하여 복잡한 양상을 띈다. 물리학은 다른학문과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통찰을 주고 우리의 우주에 대한이해를 높여주며 기술적응용을 가능케한다. 파리에게 과연 인간의 경제학은 의미가 있는가? 전혀 아니다 인간의 물리학체계가 의미가 있는가? 다소 그렇다 5. 과학철학적 고찰 <과학적 실재론과="" 반실재론=""> 실재는 하나 우리는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현상을 단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술하는 것뿐이다. 이데아론과 유사하다. 관념론적 실재론. <시간에 대한="" 철학=""> 시간 개념은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시간은 어떤 변화를 나타내는 척도로써 양의 방향으로 흐르도록 정의해 줄 것이다. 1초는 국제표준기구에서 '정의'한 양으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거꾸로 흐를수는 없다. 또한 열역학2법칙으로 시간의 방향성에 관해 설명하는 방식도 동의할 수 없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현상을 기술해 얻어낸 법칙이고 시간의 방향과 상관관계를 나타낼뿐 엔트로피의 증가가 시간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 낙엽이 날아갈때 낙엽의 방향이 바람의방향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간에 대한="" 철학=""> 뉴턴의 절대공간 멀리있는건 작게 측정됨 왜?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전자는 관측 전에 '실재'하는가?> 양자역학의 발달로 인해 인식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떤 물자체와 인간의 의식으로 구분하는 전통적인 이원론적 구분은 폐기되어야한다. 측정이라는 과정자체도 우리가 계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상호작용의 일부로 볼 수있다. 이 것이 간단히 생각해보아도 훨씬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다. 양자현상에 대해선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알수있을뿐이다. 우리는 측정을 했을때 어떤 물리량에 대한 확률 분포만을 알수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이론을 구성할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측정가능한 물리량(고전적 물리량)으로만 이론을 구성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공간에 특정한 점을 찍어서 입자의 위치를 할당해 표현하고자 하면 무한한 정밀도로 입자의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을것이다. 어떤영역내에서 적당히 퍼져있는것은 굉장히 합리적이다. 공간이라는 개념도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고 완벽히 특정한 위치를 할당하는 것은 추상적으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확률적 분포는 이상하지 않은 것 같다. 만약에 우리가 입자의 위치를 얻기위해서 측정을 하면 우리에게 현상으로 보여지는 입자위치의 표상은 마치 파동처럼 퍼져있는 상태(머글의 언어중 가장 비슷한 것을 가져다 표현했다)에서 정확한 값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어떤방식으로 인지될때에는 특정한 값을 가져야만 되기때문이다. 또한 어떤 다른 두 물질사이의 경계를 무한한 정밀도로 정확하게 선 그을수 있는가? 그것은 수학적으로나 가능할 것이다. 실재로는 흐릿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확률적 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파동함수의 붕괴는 내 생각에는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측정후 한상태로 결정되고 나머지 가능성은 붕괴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확률이란것은, 어떤 한 가능성을 확인하고 나면 나머지 가능성은 자연히 소멸하기 때문이다. 주사위를 던지기전에는 1~6까지의 눈이 나올 가능성이 골고루 존재하지만 주사위를 던지고난 후에는 어떤 한 눈의 주사위면이 나올것이다. 주사위를 던져 결정되고나면 자연스레 다른 가능성은 0%가 되고 한가지 가능성만 100%가 된다. 이미 일어난 일은 확률이 100%이다. 확인할때에는 어떤 특정한 값을 가져야만한다. 현상과 실재에대해선 양자역학적 입장은 실재가 무엇인지 전자가 파동처럼 퍼져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할 뿐이다. Shut up and calculate 그러나 어찌됐든 실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전자는 실재한다. 코펜하겐 해석에선 관측전엔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자는 마치 파동과 같은 형태로 퍼져있다. 우리는 실재에 대한 어떤 표상을 관측한다. 전자는 사실 실제 눈으로 본적이 없지만 실재한다고 말해진다. 결론은 관측전에 실재가 있든 없든 수학적으로 기술하는데 있어서 큰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Survey-archive 과학사회는 보수적이다. 학문의 특성상 어쩔수 없다.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많은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거부감이 많이 든다. 새로운이론이 철저히 검증되길 원한다. 양자역학의 예로 들면 지금이야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예전시대에 물질의 상태가 확률로써 결정된다고 주장하면 사이비 소리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믿을만하다. 쉽게 구축한 이론체계가 이니기 때문이다. <상대성이론과 우주론에="" 대한="" 철학=""> 상대성이론은 정말 너무나 신비하다. 상대성 이론은 시공간의 구조에 대해 알려준다. 우주는 무한하다. 그러나 유한하게 관측할수밖에 없다. 우주는 바깥은 없다 바깥이있다면 거기까지가 우주다. 올리버스의 역설, 왜밤하늘은 어두운가? 바넘효과 과거에 영향을 끼칠 순 없지만 볼 수는 있다. 거리가 멀수록 먼 과거를 볼 수 있지만 영향을 끼치기는 힘들고 거리가 가까울수록 영향을 끼칠수 있지만 짧은 과거만 볼 수있음 확률을 얘기할때 이미 일어난 경우의 수 중에서 고려를 해야한다 동시성의 상대성 광속불변의 원리 자기력은 전기력의 상대론적 효과다! 이론의 발달을 통해 보다깊은 이해가 가능해졌다. <수리철학-수학에 관한="" 고찰=""> 그렇게 되도록 정의해주었기 때문에 반드시 참이다. 분석적이다. 출발점이기 이전에 도착점이다. (그런데 공리라는게 하늘에서 뚝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귀납의 영향을 받지 않을까) 가장키큰 학생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여기서 가장 키큰 학생이요 하고 답하는것과 같다. 제곱 해서 -1이 되는 수는 제곱해서 -1이 되는 수다. 그렇게 되게끔 정해준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참인 명제를 찾고 싶으면 참인명제를 정하면 된다. 이런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수학이라는언어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기에 매우 적합한 언어이다. 그러나 수학역시 훌륭한 추상화의 도구이자 동시에 그 한계를 내포한다. 도구 그 자체가 편견이 되버린 셈이다. 이것은 필연적 결과이다. 괴델의 불완정성의 원리 제1정리. 페아노 공리계를 포함하는 어떠한 공리계도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즉 자연수 체계를 포함하는 어떤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그 체계에서는 참이면서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 제2정리. 페아노 공리계가 포함된 어떠한 공리계가 무모순일 경우, 그 공리계로부터 그 공리계 자신의 무모순성을 도출할 수 없다. 괴델의 불완정성의 원리는 나의 능력부족으로 자세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이 원리가 가지는 철학적 의의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수학의 공리체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써 수학을 형식적으로 체계화하고 완전하게 만들고자한 힐베르트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불가능하게 되버렸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한="" 비판=""> 포퍼의 반증주의나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시한 패러다임 이론은 말도 안된다. 과학을 역사적 맥락속에서 해석한것에 불과하며 과학에대한 어떤 통찰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과학철학이나 과학을 역사적사실에 기반해서 해석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 물리학은 역사학이 아니다. 과학사는 그저 맥락일 뿐이다. 다른 역사가 펼쳐졌었다면 과학을 다르게 정의할것인가? 이 것은 말이 안된다. <모든 것의="" 이론=""> 가능한가? 의미있는가? 6. 형이상학과 존재론 <존재란 무엇인가?> 크게 의미있는 질문이 아니다.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행했던 방식으로는 실제로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는게 없다. 그것은 철학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알아낼수 없다. 일원론도 아니고 이원론도 아니고 엠페도클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론도 아니다. 표준모형처럼 물리학 연구를 통해서 알아 낼 수 있다. 철학은 이제 더 이상 설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존재론(ontology)에 대한 대답은 물리학이 답할수 있다. 하지만 물리학도 근사적인 대답을 줄뿐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 라고 완벽히 확증할 수없으며, 그러한 물음이 우리가 자연현상을 기술하는데 크게 유용하지 않는다. 전자기파의 일정한 속도라는 현상을 해석하는데 에테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가설은 잘 맞지않음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에테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장의 존재를 도입하는 것이 유용함으로 '장이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음극선 실험과 여러 수많은 실험으로부터 '전자가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완벽히 존재한다고 100% 확증 할 순 없다.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필요하고 반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의 존재가 반증 될 가능성이 있다. 전통적 철학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이러한 것들을 알아낼수 없고 대체로 무의미하다. <왜 존재하는가?> 인류원리를 통한 대답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존재의 이유는 증명된 것이다. 버클리의 인식론과 유사하다. 존재하는 것은 인식되는 것이다. 질문을 하는 너가 있다는것 자체가 존재한다는 증거다. <신, 보편자 논쟁> 자유의지가 없으므로 신도 없다. 우리가 신을 믿고 안믿고 선택을 하고 천국과 지옥을 가야하는데 자유의지가 없으므로 선택을 할 수없으므로 모순이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을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 신에 관한 설명에서 매우많은 논리적, 언어적, 과학적 문제점이 발생하므로 만약 신을 믿고자 한다면 학문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되고 오직 신앙으로 접근해야한다. 나는 데카르트나 안셀렘의 신의 존재론적 증명같은 류의 논증은 잘못됐다고 본다. 나는 결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는 불가지론에 가깝다. 이원론적 구분의 폐기 데카르트는 심신 이원론을 통해 정신과 바깥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였다 정신과 물질, 주체와 대상의 등의 이원론적 구분은 폐기되어야하고 주체(인식하는 것)과 대상(인식되는 것)은 물리적상호작용을 하는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함께 고려해야한다. 대상과 관찰자를 구분해선 안된다. 이러한 인식과정의 필요성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론을 구성할때 이러한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다. <존재목적> "나"는 누구인가? 니가 쳐먹었던 밥이다. 인간의 존재목적과 존재이유는 섹스인가? 그저 다음세대로 유전자를 전달하는 생화학 기계인가? 존재론에 관한 문제는 물리학이 답하고 인간존재론은 생물학이 답할것이다. 7.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 <자유의지, 우연과 필연> 이 분야는 굳이 분류를 하자면 전통적으로 특수 형이상학에 속하는 문제이고 많은 철학자, 뇌과학자들의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하게 이 문제를 아주 꼼꼼하고 면밀하게 짚어볼 것이다. 많은자료를 참고하였지만 그 틀에 맞추어 생각하려하지 않았다. 인간의 의식 자유의지 존재유무 자유의지는 없고 확률적 과정에 의해 마치 생각한다고 착각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의지는 환상이라 생각한다.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구분은 폐지되어야하며 우리의 의식도 물리법칙의 결과일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참 신기한 현상이긴하다. 자유의지도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자유의지라는 단어는 정확히 무슨의미인가? 중국어방 논증 의식은 간단한 현상으로 환원될수 있다. 인공지능이나 인간이나 비슷하다. 우리는 생물학적기계이다. 간단한 것이 모여 복잡한 의식을 이룬다. 언어때문에 우리가 의식을 가진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냥 자극에 반응할 뿐인데 언어가 있기에 생각도 할수있고 의식이 있는것처럼 느끼는것 같다. 송충이는 의식이 있을까? 튜링은 튜링테스트를 통해 인공지능이든 사람이든 질문의 답변을 구별할 수 없다면 생각할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입력과 출력이 같으면 같은 함수라는 철학이다. 프로그래밍에서 덕타이핑(duck typing)과도 유사하다. 같은 기능을 하면 같은 것이라보는 기능주의적 관점이라고도 할 수있다. 나역시 이런 입장이다. 우리도 컴퓨터와 다를바 없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레플리컨트(복제인간)와 인간을 구별하는 장면을 참고. 자유의지에 대한 고민은 아무리해도 답을 정확히 모르겠다. 우리의 의식은 물리적,물질적으로 환원될 수 있고 자유의지가 없다는 편에 생각이 가깝다. 유물론적인 시각이라 할수있다. 언젠가 의식이 생겨났고 스스로가 누군지 묻기 시작했다 자유의지는 환상이다. 우리는 의식을 통해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뿐이다. 이것은 의식적인 움직이겠다는 의지는 움직임을 유발하는, 움직임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움직임은 움직이려는 생각 또는 결정 이전에 이미 두뇌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움직이겠다는 의식적인 의지는 이미 움직임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인지'하고 알아차리는 것에 불과하다. 생명의 경계는 어디인가?어디까지가 생명인가? 물리법칙을 따르는 자연현상의 하나이다. 의식과 의지는 허상이다. 그저 주위환경에 반응하고 자극에 반응할 뿐이다. 뇌가 발달하고 언어와 고등한 의식이 생기면서 마치 그렇지 않은듯 착각하는 것 뿐 플라나리아를 두 조각으로 자르면 두 조각모두 마치 하나의 생명체 였던것 처럼 살아서 움직인다.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플라나리아의 의식은 어디로 갔는가? 두개로 쪼개진 것인가? 애초에 의식이 있기는 했을까? 어떤 순간부터 의식이 생기는 것일까? 의식은 그저 환상인가? 인공지능은 의식이 있다고 할수 있는가? 영화 트랜센더스 등 참고 의식에 의해 동작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작이 일어나는 가운데 그 중간 시점에서 "'움직이겠다'는 결정을 한 것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벤저민 리벳의 실험결과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모든것이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가장 낮은 물리학적 레벨에서도 그렇고 사회적 관계속에서도 그렇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또한 내 자유의지가 아니고, 또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이다. 인생의 매우 중요한 많은 부분들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어느 지역의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 것인가. 어떤 시대에 태어날 것인가. 우연히 어떤 정보를 접할 것인가. 어떤 영향을 끼칠 사람을 만날 것인가. 구체적으론, 어떤친구를 만나느냐 어느학교에 붙을것이냐 등등 우리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들이다. 사회적 우연,생물학적 우연, 물리학적 우연, 지리적 우연 가능세계 작은변화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할수도 있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보다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에 어떤일이 일어나는지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환경적 요인에 의해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고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며 환경에 지배당한다.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게 환경에 지배당하는지 아는가? 너무나 나약하게 흐르는 강물위의 나뭇잎처럼 흘러간다. 많은 가능세계중 단 하나의 가능세계만 가능하다 우연히 큰병에 걸린환자가 그때 그일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후회한다 근데 우리가바로 그 상황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뿐. 우리한테 일어나지않았으니까 지리적 우연 어린시절 얼마나 좋은교육을 받았는가 하지만 어쨋든 많은 가능성중 우리는 한가지 인생만 살 수 있고 하나를 선택해야함. 완벽한 선택은 없음 다른 선택지를 후회하지 말자. 마치 모든 것이 운명인것같이 살자. 인생을 결정하는 요인들 유아시절 타고난 특성과 경험, 학교와 가정에서의 환경 등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 너는 나쁜 사람을 욕할 자격이 있는가? 너도 똑같다. 다만 그 상황이 일어나지 않은것 뿐이지. 권력자들은 왜 하나같이 다 부패할까.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권력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21세기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혜택을 보고있다. 특히 인터넷이 있는 시대에 살기때문에 엄청난 양질의 정보를 너무나 쉽게 접하고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을 것아닌가. 그리고 지금도 내가 그럴수도 있다. 정보의 교류는 매우 중요하다. 인터넷과 카메라는 혁명이다. 문자도 혁명이다. 지금은 없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지금도 항상 내가 우물안에 갇혀있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두고 있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다.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묻혔을까?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사라졌을까? 그래서 기록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어떤 기억을 잊어버렸는데 기억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면? 결정론적 세계관을 지지하던 확률론적 세계관을 지지하던 자유의지는 없다. 우리의 뇌도 결국 세포,분자수준에서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 뿐이다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므로써 엄청난 허무주의에 빠질것같은 위험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없지만 마치 자유의지가 충만한것 같이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겠다.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갈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살면 그것이 자유의지가 없는 세계에서의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결론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던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던 자유의지가 있는듯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동기를 가지고 마음먹고 행동을 하는 것일까 행동을 한다음에 이러한 동기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운명의 과학이란 책에 나온 실험결과를 보면 후자인듯하다. 행복해서 도파민이 나올까 도파민이 나와서 행복하다고 느낄까? 리벳실험 (1)실제 자유의지가 있는 경우 ㄴ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 ㄴ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2)실제 자유의지가 없는 경우 ㄴ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 ㄴ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생명과 의식=""> 생명현상의 복잡하고 정교한체계는 너무나 놀라워서 그저 감탄할뿐이다. 트랜지스터를 이용한 디지털 논리회로대신 유기화합물을 사용하는 컴퓨터랑 똑같다. 생명은 공부할수록 생화학적메카니즘으로 움직이는 컴퓨터같다는 생각을 한다. 컴퓨터의 명령어가 그저 단순히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일뿐 명령어는 실재하는것이 아니다. 기능주의적 관점이다. 복잡한 자유의지가 있는것 같은 생명현상도 자세히 살펴보면 분자수준에서 화학반응에 불과하고 화학반응은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저 물리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원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정교한 체계로 작동하고 의식이 생겨날수 있는지 정말 신기하다. 우리가 간단히 말하는 과정조차도 엄청난 뇌의활동이 필요하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도결국 물리적으로 환원될텐데. 생명은 물질대사와 자기복제를한다. 스스로를 유지하려고한다 그런데 자세히들여다보면 세포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있는것이 아니라 그저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일것이다. 그런데 겉보기에는 어떻게 자유의지가 있고 의식이 있는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세포들은 우리몸을 위해 사는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본인이 살기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도 진화론으로 해석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복잡한 유기체에 적합한 생존방식이 나타났고 자연선택됐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생존하는 생명체는 생존에 적합하기 때문에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세포들이 왜 생존을 위하는 행동을 하는지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번식을 하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렇지 않은것은 번식하지 않았을것이고 그렇기에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그렇기에 생존하는 모든 것은 번식하려고한다 우주는 자신의 존재를 위해 의식을가진 생명체를 필요로 한다._위그너 8. 삶의 의미, 사랑 <낙관적 허무주의=""> 생각하는 별먼지,우주의 티끌일뿐라도 이렇게 스스로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존재는 인간뿐이지 않은가 그러니 인간은 위대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너무나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지금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놀라운 시대에 살고있다. 생물은 생화학적 메카니즘으로작동하는 컴퓨터와 같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있다 다시 원자로 흩어짐 우연한 진화적 산물에 불과 우리는 반드시 모두 죽는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내가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진짜 현실같은 꿈을 꿔본적 있는가?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있는 이 순간이 진짜 현실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꿈이라면 우리가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깨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분명 우리가 인지조차 못하는 어떤 수많은 우물 안에서 살고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우물의 존재자체도 모른채 평생을 살 것이다. 사실 우리의 존재 목적에 어떤 다른 외계인의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알 방법이 있는가? 우리가 중요한 일을하다가 날아가는 파리를 아무생각없이 죽이면 아무 영문도 모른채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파리같이 우리도 비슷하다. 먹이를 기다리는 닭과 같다. 우리는 먹이주는 시간을 분석하고 예측하고 나름의 답을 얻겠지만 하루아침에 도살장으로 끌려가 버릴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너무나 나약하게 끌려다닐것이다. 도대체 생명은 왜이리 가혹하고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것인가... 어쩌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일지도.. 진리를 깨닫는다 쳐도 막상변하는것은 크게없다. 우리기분이 좋아지겠지 복잡한 유기체덩어리에 불과하며 우연한진화적 산물에 의해 특별한 방식으로 세상을 인지한다. 필연적으로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본다.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볼지라도 어찌됐든 우리 인간의 기준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것 같다. 너무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조심해야 할것같다. 생화학반응으로 움직이는 유전적프로그래밍기계에 불과하더라도 인간의 의식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물리학이나 과학도 절대 완벽하지 않다. 지금껏 논리실증주의적 입장을 지지해왔지만 역설적이게 나는 음악,예술같은것이야 말로 의미없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진정가치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멋드러진 풍경을 보면 가슴먹먹해지는 노래를 들어본 경험이 있는가? 만약 우리가 정말 진리에 가까운 지식들을 밝혀내었다고하자. 그럼 우리의 뇌에서 신경회로가 조금 변할것이다. 그리고 밝혀냈다는 사실에 기분이 조금 좋아질 것이다. 현실이 무엇이 달라지는가? 어쩌면 참 허무하다. 모든 것은 어쩌면 무의미 하다. 인생의 의미는 부여하는 것. 니체의 사상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않으려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결국 우물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랬더니 더 큰 우물이 또 있었다. 그 우물 밖을 나갔다너 또 더 큰 우물이 있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평생우물을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중요한것은 오만하지 않고 스스로가 무지하고 우물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태도 이구나.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도 동일하다. 한편으론 허무하다. 우물밖을 나가서 모든것을 이해하는 것은 평생 불가능할테니. 우물안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빠져나가는 방법을 모른채 헤엄치다 죽겠구나 결국 답을 알지못하고 죽을것이라면 답을 찾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쩌면 행복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있다면 아무것도 모른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나보다 훨 나을수도 있다. 열쇠구멍을 통해 문밖의 세상을 보고 구멍을 넓히기 위해 애쓰고 발버둥치지만 결코 문밖을 볼수는 없다. 지식의 한계를 지적함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고 자연현상에대한 이해를 엄청나게 높여 인류의 질적삶의 향상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쳤다. 생각하는 우주먼지는 위대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대답은 사랑이다. 시지프스 신화 사랑은 돈한푼들지 않으며 타고난 특별한 능력도 필요하지 않으며 베풀수록 줄지않고 늘어날 뿐이다. 누구든지 할수있다.이 얼마나 좋은가! "나는 바닷가에서 노는 한 소년과 같았다. 내가 더 예쁜 조개와 더 동그란 조약돌을 찾는 동안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여전히 말없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 Sir Issac Newton 세상앞에 나는 개미의 크기였지만 밟히고 싶진 않았다. 니체철학의 핵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에 도전해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의미한 인생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야한다. 인간의 삶은 단순히 생명의 연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논리실증주의자로써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무의미한 토론을 멈춰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역설적으로 어쩌면 이것들이야 말로 가치있는 것들이라 생각한다. 시와 음악, 사랑같은 것들이 우리의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아름다운 것들이다. 나는 사랑없이는 살 수 없고 혼자서는 살수없다. 나는 내 청춘을 물리학을 공부하는 데에 바쳐왔지만 우주를 이해하는 것보다 사랑이 나는 더 중요하다. 이태원클라쓰에서 박새로이가 그토록 염원하던 복수와 절대 꿇지 않던 무릎을, 왜 사랑앞에선 그토록 쉽게 꿇었는지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이 중요하다. 의미없는 삶에 사랑과 음악이 의미를 부여해준다. 죽음앞에서는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죽음을 생각할때마다 나는 아직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솔직히 두려운마음이 아직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함께이기에 사랑이 있기에 견뎌낼만한거같다. 사랑은 인류최고의 발명품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중요하기에 치열하게 사는가?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우주의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 이 글에대한 비판과 반론 인지체계가 다른 종이 어떻게 같은 불을 보고 도망가지? - 철학적 논의에 영감이 될만한 영화들 매트릭스 컨택트 인셉션 마이너리티리포트 셔터아일랜드 나비효과 스페이스오디세이 맨프롬어스 클라우드아틀라스 소스코드 트루먼쇼 인터스텔라 프로메테우스 에이리언:커버넌트 이 글의 저작권은 유준식에게 있으며 공유시에는 저작자를 표시하셔야합니다. Copyright 2022.(JoonSik Yu) All Rights Reserved. <참고자료> 1. 부분과 전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2. 논리철학 논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3. 철학이란 무엇인가, 버트런트 러셀 4. 더 브레인, 데이비드 이글먼 5. 현대 분석철학, 뮤니츠 6. 니체의 인생강의, 이진우 7.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8. The deep history of ourselves, 조지프 르두 9.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10. 5분 뚝딱철학, 김필영 11.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12. 제일 철학에 관한 성찰, 르네 데카르트 13. 과학혁명의 구조, 토마스 쿤 14. 형이상학과 존재론, 박준호 15. 인간의 뇌, Rita Carter 16. 그림으로보는 뇌과학의 모든 것, 박문호 17. 인식론-우리가 정말로 세계를 알수있을까?, 황설중 18. 현대인식론 입문, 마티아스 슈토이프 19. 물리학의 역사와 철학, James T. Cushing 20. 위대한 설계, Stephan Hawkins 그외 위키피디아(Wikipedia), 스탠포드 철학백과사전(SEP) <더 읽어볼="" 거리=""> 하버드 생각수업 꽃들에게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