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본질과 한계(작성중)
이 글은 편집하여 각각의 주제로 다시 포스팅할 예정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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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인식론적, 인지과학적 분석을 통한 인지의 한계 (자연주의적/피론주의적 입장/이데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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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본질과 특성 2-1. 언어의 본질과 특성 언어의 탄생, 언어에 대한 고찰
2-2. 앎, 지식, 이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식-상대주의적 입장, 인류원리와 진화론적 사고, 관찰의 이론적재성과 모델 의존적 실재론)
-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구성해야 할까? 3-1. 논리적 언어로서의 수학의 필요성(논리실증주의적 입장)
3-2. 세상을 이해하는 물리학적 방법론 물리학을 통한 지식의 구성, 과학적 방법론(귀추), 과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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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물리학의 한계, 인간의 필연적 한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 (극단적 회의주의적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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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적 고찰 -양자역학의 철학과 측정의 문제 (전자는 관측 전에 ‘실재’하는가?) -상대성이론과 우주론에 대한 철학 -시간이란 무엇인가? -생물학과 뇌 과학에 대한 철학(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수리철학 -역사적해석의 오류(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포퍼의 반증주의) -통일장 이론, 모든 것의 이론 -과학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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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존재론 존재란 무엇인가? 무엇이 존재하는가? 우주와 생명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왜 존재하는가? 신/보편자 논쟁과 종교 정신/물질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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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 자유의지는 환상이다! 너무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 의식의 메카니즘, 우리는 정말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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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낙관적 허무주의, 니체의 초인사상,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한 ‘사랑’
-이 글에 대한 비판과 반론
-철학적 논의에 영감을 주는 영화들
-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에대한 인식론적, 인지과학적 분석을 통한 인지와 지각의 한계
우리의 뇌는 처리과정에서 너무나 쉽게 정보를 왜곡한다.”The brain”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의 뇌가 얼마나 세상을 잘못이해하는지에 알 수있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 특정한 필터를 거치면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왜곡이 되는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왜곡은 우리 내적의 심리적,정서적인 것, 또는 배경지식,환경, 기억에 따라 달라지는 것,또는 착시현상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이라던가, 로르샤흐 검사라던가, 선택편향 확증편향, 인지편향 같은 심리적인 작용에 의한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도 많은 왜곡을 수반하지만 기계장치를 이용한다거나 우리가 특정방식으로 인식하는 법을 훈련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런것들이 아니고 우리가 감각체계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의 극복할수 없는 필연적인 본질적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한번 앞을 바라보자. 앞에 보이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알수있다고 장담할 수있는가? 우리는 그 물체가 반사한 빛을 시각정보로 받아들여 뇌속에서 재구성한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앞에있는 빨간 사과를 보자. 사과가 빨갛다는 지식이 확실한가? 파란색 불빛으로 사과를 비추면 사과가 보랏빛으로 보일 것이다. 살짝 옆으로 이동해서 사과를 보자 그럼 우리가 보는 사과의 모습은 크기와 모양이 조금 달라져 보일것이다. 당신이 보는 사과의 모습은 과연 확실한가? 우리가 감각경험을 통해 받아들이는 지식은 절대적이지 않다. 이러한 생각은 옛날부터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피론주의자(pyrrhonist)들이 그러하다. 피론주의자들은 강한 회의주의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우리가 어떠한 지식도 정확히 알 수없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인식을 통해 현실의 그림자를 파악할뿐이며 관념적 표상을 머리속에 구성한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사실이야말로 존재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며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 우리는 절대로 본질을 그 자체 그대로 파악할 수 없고 본질의 감각소여(소리,색깔 등)를 통해서만 인지할수 있다. 순수한 형태 그대로를 파악하는 법은 없다. 그런방법은 인지되지 않는 것이다. 순수한 실재 그대로를 파악하는 방법은 인식을 하는 주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면 된다. 그럼 어떤한 필터도 없이 그대로를 보게 될것이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아무것도 알수없는 주체다. 인지되기위해선 특정방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지과정이 없는데 어떻게 인지될 수 있겠는가. 필연적으로 어떠한 필터를 거쳐야만 우리에게 인식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특정방식은 현실을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과정에 따라 변형된 표상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예를들면, 우리는 물체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물체가 반사한 빛을 보는 것이다. 또, 우리가 물체를 만지는 것은 착각이다. 원자간의 반발력으로 절대 만질수 없고 만진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특징을 인지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듣는다 라는 인지과정도 살펴보자. 허파에서 공기가 나온다 성대가 진동한다 성대의 진동이 공기매질의 변화로 종파로 전달된다 귀에 들어온다 달팽이관을 울린다 청각신경세포를 통해 뇌로 이동한다 반복된 패턴이 시냅스의 연결을 늘리고 뇌에 기억된다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소리가 실재하는 것처럼 느낀다 본다라는 인지과정을 살펴보자. 인간의 감각중 가장큰 영향을 끼치는 시각이 인지되는 방식을 뇌과학적으로 자세하게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세상을 잘못인지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빛이 반사되고 각막과 수정체에서 굴절되어 망막에 맺힌다.~~~ 색깔이란 무엇인가 본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절대 동시에 볼수없다. 광속의 제한이 있다. 우리는 항상 과거를 본다.
사피엔스종의 특이한 감각체계의 필터로 현실을 구성한다. 우연한 진화적 산물로 인한 특정한 감각체계를 통해 외부환경을 인식한다. 우리가 만약 가시광선을 이용한 방법이 아니라 우연히 다른감각 체계를 통해 외부를 인식하는 생물 종 이었다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는 것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즉 지식은 생물 종에 따라 상대적이다. 고양이는 세상을 어떻게 볼까? 고양이는 맛을 못느낀다는데 “이 김치찌개는 짜다”라는 지식은 과연 절대적인가? 빨간색과 초록색을 태생적으로 구분못하는 생물종에게 “빨갛다”라는 지식은 확실한가? 인간의 인식은 진화과정에서 유용하기 때문에 선택된 도구에 불과하다. 원래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우리는 감각과 의식이 허용하고있는 경험의 범위 내에서 세상에 대한 모델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식될수 없는 것, 느낄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채로 살아간다. 무엇이든지 인지 되기위해선 하나의 표상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한다.
애초에 우리의 관찰이란 외부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뇌로부터 변형된 감각 이미지이다. 뇌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가공된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뇌는 생각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복잡한 다세포가 생기며 운동을 컨트롤할수있는 원시 신경세포가 생기고 이것이 진화를 거듭해 뇌가 된다. 뇌는 그저 생존을 위해 만들어졌다. 감각을 통해 현실처럼보이는 우리 머릿속안의 환상이 있을뿐이다. 우리는 각자의 뇌속에 창조된 허상의 세계를 살고있다. 인식은 생명현상이 발명해낸 것이다! 우리는 그저 주위환경과 자극에 반응할 뿐이다. 우리는 인지체계의 감옥안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하는 현상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가 만약 가시광선대역 파장의 전자기파가 아닌 다른 방식의 인지체계를 가진 생물종이라면(자외선 파장대만을 인지한다던가 등)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들은 지금과 훨씬 달라졌을것이다. 지금 우리주위에도 자외선 적외선 등 다양한 파장의 빛이 떠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가시광선을 통해서만 시각정보를 얻을수있다. 만약 우연히 자외선 파장대를 이용한 생물 종이었다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현실을 보게 될것이다. 자외선이나 적외선등은 우리눈에 보이지 않을뿐 지금 우리 주위에도 존재한다.
시각장애인, 시청각장애인의 사례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어떠한방식으로 머릿속에 세상을 인식할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또한 물체를 측정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연적 오차가 수반된다. 물체를 측정하는 것또한 상호작용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 맛을 측정하기위해선 반드시 조금이라도 아이스크림을 건드려야한다. 완전히 어떤 교란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측정하는 것은 없다(참고로 이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아니다). 단순히 본다는 과정조차도 미시적으로 살펴보면 교란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언가를 온전히 그대로 인식한다는 과정은 불가능하다.
즉 요약하면, 1.측정과정에서 필연적 오차(불확정성원리와 관련없음) 어떤 오차도 없이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스크림 맛을 보기위해선 조금이라도 아이스크림을 핥아야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오차를 수반한다.
2.인지한다는 것은 특정방식으로 우리의 뇌속에 정보가 전달된다는 것이고 특정방식은 현실을 그대로 표상하는것이 아닌 변형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현실의 그림자를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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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각체계를 통해 인지하느냐에 따라 인지과정이 달라질 것이고 만약 우리가다른 감각체계를가진 생물종이었다면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들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식에대한 종-상대주의적 관점이라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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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체를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 아닌 감각소여(예컨데 물체가 아니고 물체에 반사된 빛)를 인지하는 것이다. 현실을 온전히 그대로 표상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학적 실재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관념적 표상만을 본다.
따라서 객관적 실재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실재를 명확히 볼수는 없는 없고 관념적 표상만을 얻을 뿐이다. 마치 깜깜한 동굴속을 더듬거리며 동굴을 모양을 추리하는 것과 같고 코끼리의 다리, 코, 꼬리를 각각만지면서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유추하는 것과 같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어항 밖의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어떤 창을 통해 창밖의 세상을 본다. 어항 속 물고기는 어항의 모양에 따라 다르게 굴절된 빛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가 우리의 세계의 한계다.
플라톤 동굴의 비유가 매우 좋은 비유이다. 우리는 동굴속에서 횃불에 비친 현실의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동굴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 즉 이데아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를 명확히 바라볼 수 없고 근사적으로만 바라볼 뿐이다.현실은 우리의 신체적조건에 의해 제한된 특정한 방식으로 밖에 인식될 수 없다. 우리는 인지체계 덕에 세상을 인식하고 머릿속에 현실을 구상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그것은 생각의 감옥과도 같은 것이다.
결론 :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류의 물음에는 답할 수 없고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하는 현상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뇌 속에 구성한 세계는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를 그린 그림이다. 관념은 실물의 대리인일 뿐이다.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견해 인식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나의 인식론에 대한 주장에서 나는 단어의 뜻을 엄밀히 정의하는 식의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재론 관념론 합리론 경험론 토대론 정합론 같이 본래 철학의 전통적 인식론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을 사용하거나 언어적으로 명확히 하는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고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립관점에서 살펴보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으로 구분된 인식론적 입장은 오히려 우리의 사고를 편협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재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고 어떤 관념적인 표상을 얻을 뿐이라는 느낌을 이해했으면 한다. 나는 주로 뇌 과학과 인지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해 인식의 한계를 지적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자연주의 인식론이라 부른다. 현대에 들어서 생긴 자연주의 인식론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고 인지하는 과정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자연주의 인식론을 제창한 사람은 콰인(W.V.Quine)이 있으며 그는 “Epistemology Naturalized”에서 전통적 인식론의 한계를 지적했으며 자연과학의 한 부분으로 인식론을 전환하려고 한다. 나 또한 인식론에 관한 논의에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접근하였다.
- 지식의 본질 2-1. 언어의 본질과 특성 언어의 탄생, 언어의 발전 과정
문법적으로 맞는 말이라도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 많다. 단어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며,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맥락에따라 어떤 의미를 지칭하도록 기능할뿐이다. 러셀은 ‘기술이론’에서 언어는 사태를 기술하는 불완전한 기호일 뿐이라고 하였다. 🍎 를 사과라고 부르면 이것은 우리가 🍎 를 지칭하기 위해 언어로 추상화된 기호를 나타낸 것뿐이다. 이 것을 가지고 “사과가 존재하는가?, 사과란 무엇인가?”같은 논쟁은 무의미하다. 원자들이 모여 어떤 물체를 이루는 것이고 변할수도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그것을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해 편의상 부르는 것을 가지고 언어가 지칭하는 것이나 고유명사가 뭐니하는 언어철학은 비효율적이다. (언어는 이토록 불명확하지만 어쨋든 잘 기능하고 의사소통을 가능케한다) 언어의 기원과 발달 인간의 뇌가 조금씩 발달하고 소통을 위해 언어가 필요해졌다. 특정 상황에선 이렇게 말하고 다른 상황에선 저렇게 말하고 이것이 기억되고 패턴화되고 여러 인간이 따라 사용하여서 관습적으로 쓰이면서 언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바벨탑신화? 언어행동주의 언어의 출현과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모텐 크리스티안센과 닉 채터의 저서 ‘진화하는 언어’에서 주장하는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아기가 태어나고 빛을 통해 세상을 인지한다. 어떤 다른것과 구분되는 일정한 시각적 자극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꾸 동일하게 ‘검은색’ 이라는 말을 한다. 아기는 자연스레 그 단어를 기억하고 다음번에 동일한 자극이 들어왔을때 자기도 ‘검은색’이라고 따라 말한다. 우리는 커가면서 익숙해지고 ‘검은색’이라는 단어가 원래있었고 완전한거 같이 느낀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 우리가 소리(공기매질의 진동)의 패턴에 의미부여를 하고 익숙해 진것이며, 시각적으로 검은색과 흰색의 구분에 특정한 기호와 패턴을 약속하고 의미부여 한 것이다.
언어와 사고는 관념적표상과 기호,심볼을 통해 추상화된다. 언어는 세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또한 동시에 언어는 사고의 근본이자 생각의 감옥이다.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다. 언어는 강력한 추상화의 도구이자 동시에 우리의 한계다. 문자 또는 문자의 소리,즉 말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표현할 수 있게함과 동시에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는 강력한 울타리이다. 만약 우리가 더 나은 표현방법을 찾는다해도 결국 그것은 또 다른 울타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무엇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그 문제를 언어로 치환한다(그래야만 탐구할수있다). 하지만 치환하는 동시에 그 관념에 갇혀 본질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언어의 문법구조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제한짓는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단어내에서만 세상을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고 형식적으로 인정된 문법구조내에서만 문장을 쓸 수있다. 언어라는 추상화를 통해 세상을 표현할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명확한 한계를 정한다.이것을 보고 하이젠버그는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했다. 그 어떤 표현방식도 표현방식임과 동시에 그것의 필연적 한계를 내포한다. 지금 나의 모든 생각과 논증도 언어라는 감옥안에서 이루어지고있다.우리가 어떤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선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 언어가 있기에 우리가 생각도 할 수있고 소통을 통해 우리가 이만큼 발전할 수있었다고 생각된다. 언어가 있기에 생각도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추상화할수 있으니까.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수있는 단어는 제한적이기에 우리는 그 안에 갇혀 빠져나올 수없고,또 언어로 인해 답이 없는 무의미 하지만 그럴듯한 수많은 형이상학적 명제들이 생겨난다. 본질을 알지 못한채로 그 주위를 빙빙 돌뿐이다.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본래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생존과정에서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의사소통체계일 뿐이다. 세상을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기에 완벽한도구는 아니다. 외국에 살면서 외국어를 쓰면서 본인의 생각이나 기치관이 변했던 경험이 있는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 달라진다.
2-2. 무엇인가를 “안다”,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통적 인식론에서는 ‘안다’, ‘지식’ 이라는 것이 어떤것인지 연구한다. 일반적으로 지식이라는 것을 ‘정당화된 참된 믿음(Justified True Beilf,이하 JTB)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철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정의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논의를 전개하며 인식의 과정을 밝히려 한다. 자연주의 인식론에서와 같이 인지과학적 방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수있다. ‘안다’는 것은 “안다”라는 단어의 글자형상 기호가 우리의 시각에 인지되고 이것이 뇌세포로 전달되고 반복적으로 이러한 자극이 입력되면 익숙해지게 되어 우리는 ‘안다’는 단어의 뜻을 안다고 생각한다.
<인류원리적,진화론적 사고> ~니까 ~인것이다(당연하게 생각해보기) >인류원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하자. 진화론적 사고는 정말 아주 상식적인 방식이다. 어째서 기적적인 확률로 인간처럼 고등한 의식을가진 존재가 태어났을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확률이든 높은확률이든 이미 우리가 존재하므로 이미 100퍼센트의 확률이고 그렇기에 우리가 이런질문을 할 수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을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확률이100퍼센트이다. 진화론적 방식으로 사고하는 방식은 단순히 생물학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아주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인류원리,진화론과 같은 방법론으로 사고해보자. 우리가 왜 이렇게 생겼을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이 생존에 적합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존해 있고 생존해있기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은 생존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조차 할 수없다. 모든 생물이 생존에 적합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생물은 생존해 있지 않을것이기 때문에 생존하는 모든 생물은 생존에 적합하게 행동할 것이다.
훈련소에서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인류의 위대한 인물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세계에 살고있다. 그런 세계에서는 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조차 인지할수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런세계에 살고있다. 그런일이 안일어났으면 어떡할까 고민할 필요없다. 우리는 이미 그런일이 안일어난 세상에 살고있고있기때문에 그것의존재조차 모르는 것이다.
영화 소스코드 마지막 장면
치킨이 없는 시대에 치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Aviation regulation is written in blood. 옛날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지금의 안전이 가능했다. 그냥 처음부터 가능했던것은 없다. 처음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치킨이 없는 시대에 치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번 사고를 겪고나면 그때 대비를 한다. 당연한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니 욕하지 마라. 다음부터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안전한 것은 그 전에 이미 사건이 있었기때문에 안전한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수많은 사건이 예방된채로 지내고있다. 그런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우리가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치킨이 없는 시대에 치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구지하철참사 때문에 수많은 다른 지하철참사가 예방되었다.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걸 인지하겠는가.
로또맞은 사람들을 모아놓은 로또마을에서 어떻게 로또맞았냐고 물어보니 기적적으로 운이 좋았어라고 대답하는게 아니라 여기가 로또마을이니까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총이 고장나면 사형수가 죽지않을수 있다 만약 어떤 사형수가 총이 고장나서 오발돼 살아났다고 하자. 사형수는 자신에게 기적이 있어났다 생각할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적은확률로 총이 고장나서 지금까지는 잘 발사되다가 이제 한번 고장날때쯤이 되긴했다. 그래서 한번 고장난건데 살아난 사형수는 자신이 기적이라 생각한다. 총이 고장나지 않아 죽은 사람은 이런생각도 못한다 충분히 일어날법한 일인데 살아남은 사형수는 자신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화살을 쏘고나서 과녁을 그리면 언제든 엑스턴을 맞출 수있다
내가 존재하기에 (내가 지각하는)세상이 존재한다.
존재 자체로 존재의 이유는 증명된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려고 할것이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적이기에 논리적으로 완전하면서 존재론에 대한 대답을 준다.
총알을 맞은 전투기가 전투에서 돌아왔다. 사람들은 당연히 전투기의 총알자국이 많은 곳을 보강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총알자국이 없는 날개를 보강해야 한다. 역설적이게 총알자국이 있는 날개를 보완하면 안된다. 총알자국이 있다는 것은 총알을 맞았음에도 살아돌아왔다는 것이다. 총알자국이 없는 곳은 총알을 맞아서 돌아오기 전에 폭발해 전투기가 추락했기 때문에 총알자국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총알자국이 없는 곳이 취약한 부분이다. 역설적이게도 총알자국이 없는 곳을 오히려 보완해야 한다.
역사의 Whig interpretation : 어떤 일이 일어난후에 보니까 마치 그전의 모든 일이 그 일을 위해서 일어났던것같이 느끼는 착각
<대부분의 지식은="" 어떤사실을="" 그저="" 분류하고="" 이름붙인것에="" 불과하다=""> 지식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 사소한 개념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예컨데 화학결합에서 전자친화도라는 개념을 도입할때 이 개념은 좀더 편리한 현상분석을 위해 도입한 것일뿐 곧이곧대로 외우고 암기할 필요없다. 본래 근본적인 관점으로보자면 전자가 퍼텐셜에너지가 낮은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화학자들이 보다 편리하게 분석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지식,분류체계는 인간이 이름을 붙이고 추상화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집착할필요도 없다. 지식의 대부분은 그저 추상화이고 분류일뿐이다. 그런의미에서 거의 모든 학문은 표기법의 학문이다. 물리학도 마찬가지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물리학은 자연현상에 표기법을 붙인것 뿐이다. 대부분의 지식은 현상을 분류하고 이름붙인것에 불과하다. <"이해한다" 라는 의미> 자연법칙은 원래 우리의 직관과 맞지않다. '이해한다'는 단어는 잘못됐다. 미터단위세계에 사는 우리는 양자역학의 확률적해석을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양자세계에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초기조건이 주어지고 작용하는 힘을알면 미래를 전부예측할수 있다는 것을 굉장히 이상하게 여길것이다. 원자가 작다는 표현은 잘못됐다. 생명체를 이루기 위해선 무수히 많은 원자가 보여 복잡한 체계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이런생각을 하는 우리는 당연히 원자보다 훨씬크고 원자가 작다느끼는 것이다. 원자가 작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고등한 뇌가 필요하고 무수한 원자의 집합이 모여 큰 개체를 이룰때 가능하므로 원자가 작은 것은 당연한것이다. 원자의 행동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상한 것은 우리다. <☆관찰의 이론적재성과 모델 의존적 실재론> 관찰가능한 물리량이란 무엇인가. '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본래 궁극의 진리같은 것은 없다. 질량이라는 양은 중력이론이 의해 생겨난 개념이다. 질량은 중력이론이 결정하고 전하는 전자기 이론이 결정한다. 정해진 것은 없으므로 무엇을 관찰할지 어떤구조로 세상을 바라볼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특정사건을 서술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의 좌표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이를 기술하는 기본적 틀을 만든다. 물리학은 기본적으로 시공간의 프레임 속에서 논리를 전개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인식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하다. 언어에서도 시제 라는 개념은 중요하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만들고 특정한 값을 할당해줌으로써 정확한 사건을 기술할수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언어를 통해 현상을 추상화하여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다. 관찰이란 무엇인가 이론이 무엇을 관찰할지 결정한다,아인슈타인의 생각(관찰의 이론적재성) 스티븐 호킹의 모델 의존적 실재론과도 유사하다. 우리가 실재라고 여기는 것들은 이론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어항 속 물고기이고 우리의 인지체계가 어항의 모양이다. 어항 속 물고기는 어항이 네모 모양일때와 어항이 세모 모양일때 보이는 바깥세상이 다를 것이다. 어항의 모양이 실재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실재에 대한 관념적 표상만을 알 수 있고 사물의 참된 본질이 아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표상되는가 하는 현상을 기술한다. 표상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을 통해 인지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현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가 '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자하는 방식으로 안다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인지체계를 가진 외계생명체는 우리와 사뭇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할 것이다. 인지체계를 통해 세상을 인식할 수있음과 동시에 그것은 편향된 필터이며 동시에 우리의 강력한 한계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지체계가 만들어낸 감옥 속에서 현실을 구성한다. 세상을 어떤방식으로 바라볼 것인가? 관찰의 이론 적재성의 한계, 순환논증의 오류 관찰의 이론적재성의 필연성 관찰의 이론적재성은 핸슨이 처음주장했고 내 주장의 맥락과는 다소 다르지만 이글에서 관찰의 이론적재성이란 단어를 쓰겠다. 열역학은 거시계의 복잡한 양상에대한 관찰의 이론적재성을 가진다. 열역학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것은 개개의 분자의 운동방정식을구해 시간에따라 궤적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물분자 개개의 쌍극자 모멘트를 구해서 그것이 만들어 내는 총 전기장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구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모른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건 거시적인 물리량이다. 어떤 이론인지에 따라 무엇을 알고자 하는지가 달라진다. 논리철학논고에 나오는 명제와 상당히 유사한 느낌인데,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고 사실의 총체이다. 사물을 묘사하는 이론,논리적 사실그림이다. 시간,공간,질량,전하같은 근본적인 개념도 선험적 지식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이다. 우리의 이론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우리가 자연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이다. 질량은 중력이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고 전하는 전자기 이론이 결정한다. 우리가 얻고자하는건 무엇인가? 관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용적인 답을주는 해석은 무엇인가? 등의 이러한 질문들을 바탕으로 이론을 창의적으로 구성하자 입이없다면 말, 언어는 있는가? 시각이 없다면 문자는 있는가? 펜과 노트가 없다면 수학은 있을 수 있는가? 학문은 있을 수 있는가? 추상화의 강력함, 어렴풋한 것을 추상화시켜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유용하다. <지식의 한계=""> 2차원세계는 3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듯 우리도 마찬가지다. 1차원에선 넓이라는 개념을 절대 이해할수 없다 3차원은 2차원에 시간축을 더하여 인지할 수 있다. 다른차원도 비슷하게 인지된다 n차원 존재는 한번에n-1차원만 볼 수 있다. 인간은 인지체계상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4차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에 수학전 추상화를 통해 표현할수는 있다. 수학의 강력한 장점이다. 3차원정육면체는 2차원 평면 전개도를통해 이해될수있다. 인간의 경험은 한계가 있으므로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자. 3차원세계사람이 구를 위아래로 움직이면 2차원세계사람은 원이 커졌다 작아지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3차원세계에서는 공을 든것인데 계속들면 2차원세계에서는 공이사라졌다고 느낄수도 있다. 인간은 마치 2차원세계의 존재이고 3차원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2차원에서 3차원 좌표축을 생각해보자 그것들이 실제 90도 인가? 아니다 120도 정도 된다. 이 것을 그냥 우리가 90도라고 믿는 것이다. 4차원도 추상적으로 믿으면 된다. '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본래 궁극의 지식같은건 없다. 참인 것을 찾고싶다면 우리가 그것을 참이라고 정해주면 된다. 지식을 구성하는 방법에는 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참된 지식,궁극의 지식 따위란 없으며 인간이 지어낸 환상에 불과하고 우리는 실재가 아닌 현상을 기술하는 이론체계를 가질뿐이다.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것이고 지식이란 무엇인가하는 인식론적 물음은 매우중요하다. 나는 외계 지적생명체는 어떤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지 무척 궁금하다. -선험적 지식의 오류 칸트 비판철학이나 아펠의 선험화용론 따위에서 제시하는 선험적인 지식(선험적인 인식의 구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이다. 시간과 공간같은 개념또한 인간이 소통을 위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일뿐이다. 우리가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구조가있어야 언어적활동을 가능케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시간이나 공간은 경험과 독립적으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지식, 즉 a priori 가 아니다. -생물학자들의 서술방식에 대한 비판 ~을 위해서 세포가 ~를 한다 따위의 서술은 잘못되었다. 그저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며 그것이 생존에 적합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건이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마치 생명을 위하는듯이 행동하는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개별세포는 개체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을 위해서 라는 표현을 통해 목적론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은 고쳐져야 한다. 그렇기때문에 '몸에 상처가 나면 몸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한다' 같은 류의 설명이나 미토콘드리아가 세포활동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ATP)를 생성한다 라는 류의 설명은 논리적으로 잘못되었다. -역사학자들의 서술방식에 대한 비판 우리가 직접 그것을 본것이 아니고 기록을 통해 재구성한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략적인 모습만 알 뿐이다. 완벽히 객관적으로 서술되는 방식은 없다. 역사라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누군가의 관점으로 쓰여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텍스트로 접하면서 공부를 할때 굉장히 그럴듯하면서도 비효율적이다. 사람들은 알아도 막상달라지는게 없다. 사실이 아니라 의의를 되새기는게 중요한 것이다. 현실과의 괴리감 -사회학에 대한 비판 사회학은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효율적, 당연한 것에 이름을 붙이고 굳이 복잡하게 생각한다. -School kills creativity 교육이 오히려 사고를 제한한다. 어떤 지식을 가르쳐주면 그 특정 사고방식에 갇혀 그 안에서 밖에 생각할수 밖에 없다. 어떤 방법을 알려주면 자꾸 그 틀안에서만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 편견없이 선지식 없이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미존재하는 지식이 사고의 틀을 제한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을때 다양한 창의적인 의견이 나올수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도 전에 특정방법을 가르쳐줌으로써 우리의 사고에 크나큰 제한이 생기게 된다. 어떤 한 방법을 알려주면 우리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 방법안에서만 갇혀 생각하게 되버린다. 지식을 습득하기 전에 반드시 본인 스스로 생각해보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그 어떤 선입견과 편견도 없이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한다. 교육이 오히려 사고를 제한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로막고 창의력을 제한한다. 올바른 교육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야한다. 학교가 창의성을 죽인다. 분류를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생각을 제한짓는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분류를 한 것일뿐 이러한 분류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3.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구성해야 할까? 3-1.일상 언어의 한계와 논리적 언어로서의 수학의 필요성.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논리실증주의적 입장) 분석철학의 바이블로 언급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나오는 마지막 명제를 인용하겠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한다." 문제는 언어다. 언어란 감옥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자유란 무엇인가,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의 목표인 물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류의 본질을 탐구하는 목표나 현상너머의 사물의 참된 본질을 찾는 과정은 동의하지만 그 것은 반드시 수학적으로만 전개되어야 하고 물리학적 방법론을 통한 것이어야 할것이다. 철학은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하고 언어의 한계때문에 완전할수없다. 단어의 의미같은것을 쫒다보면 결국 우리는 단어를 완벽하게 정의하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것이다. 단어들끼리 순환적으로 정의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완벽히 정의할수도 결론 내릴수도 없는 것이다. 굉장히 본질적인 개념들 을 나타내는 단어들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기호체계를 가지고 논리적 언어를 만들자. 복잡한유기체덩어리가 의미부여한 일상언어의존성을 탈피하고, 기호를 이용해 논리적 언어를 구성하자. 대륙철학으로 대변되는 철학은 대부분 내생각에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특히 논리실증주의에 대항하여 생겨난 현대철학사조중 하나인 현상학(phenomenology)에 관한 것은 정말 헛소리들 뿐이라 생각한다.정답을 내릴수없는 논의이다. 참 거짓,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의미를 토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단어들은, 그런 단어들을 포함해 기술하는 명제들 사이에 관계들을 나타내는 역할과 우리가 할수있는것과 할 수없는것을 구분할뿐이다. 소쉬르는 그의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는 그 스스로 무엇을 지시할 수 없고, 단지 자신과 다른 기호와 의미의 분기 또는 차이를 만듦으로써 지시한다고 설명한다. 엄밀하게 정의된 개념도 아니고 그럴수도 없다. 정답도 없고 앞으로 정답을 찾지 못할것이다. 무의미한 토론이다. 언어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나는 엄청나게 많은 철학적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수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한다. 20세기초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기존의 철학적 방법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이 생겨났고 슐리크,카르납,라이헨바흐와 같은 오스트리아의 빈 학파를 중심으로 수학적사고와 과학적방법론을 중요시하는 논리실증주의/논리경험주의가 전개되었다. 나 역시 논리경험주의적 태도를 계승하였다. 오직 검증가능한 과학적 진술들 및 논리학이나 수학 등의 논리적으로 동어반복적인 진술들을 통한 논증만이 유의미하다. 전통적인 철학적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명제는 경험적나 실험적으로나 검증가능하지도, 수학처럼 논리적으로 동어반복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현대 분석철학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있다고 본다. 논리적 언어의 사용에만 중점을 맞추고 경험적인 증명을 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전통적 논리실증주의적 입장과 조금 다르다. 먼저 종합명제와 분석명제의 구분을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종합명제가 과학적명제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밀한 규칙을 정할필요는 굳이 없다. 논리실증주의는 결국 물리학을 하면 되는 것이다. 3-2. 세상을 이해하는 물리학적 방법론, 물리학이란 무엇인가? physics is not metaphysics 물리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물리학은 귀추적이다. 인식의 한계,지식의 본질 등을 탐구하였고 논리실증주의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들을 바탕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지식을 구성하여야 할까? 위의 논의들을 바탕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봐야할지 생각해보자. 답은 바로 물리학적 방법론이다. 물리학의 정의 : 과학 또는 물리학에서 적용해야하는 유일한 방법은 없으며 새롭고 창의력있는 방식으로 논증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학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해 답을 해보도록 하겠다. 호모사피엔스 생물종의 뇌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인지 수준에서 수학이라는 자연의 언어를 이용해 자연현상이'어떻게'작동하는지('왜'가 아니고'어떻게'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설명하는 환원주의적, 보편적 이론체계를 근사적으로 구축하는 학문,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이름을 기가막히게 훌륭하게 지었다. 절대적 진리를 찾는것이 아니라 모든현상을 기술하는 방법론,이론체계를 찾는것. 물리학은 환원주의 즉, 보다 단순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복잡한 현상도 알고보면 단순한 법칙에 의해 설명될수있다고 가정한다. 가장 단순화하여 설명한다는 것은 물리학이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핵심적 특성이다. 오컴의 면도날법칙이다. 최상의 설명은 가장 단순한 설명이다. 물론 단순함도 중요하지만 합리적사고과정을 간과하면 안된다. 단순함만 추구하다보면 비합리적인 결과를 얻을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어떤편견도 없이 생각하도록 노력하자.(히캄의 격언, 환자는 모든 병을 가질수 있다) 물리학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연현상을 실험사실에 의존해 다룬다. 물리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형이하학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실험적 증명이 뒤따라야한다. 이론과 실험이 대립한다면 폐기되어야 할 것은 이론이다. 여기서 나는 관찰이란용어대신 실험이라는 용어를 쓸 것이다. 관찰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가시광선파장대의 전자기파를 이용한 시각정보에만 크게 의존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또 감각은 정확하지 않고 주관적이다. 또 관측보다는 수학적 이론모델이 중요하다. 관측할때는 지구가 정지해있고 태양이 도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하지만 태양주위를 지구가 도는 것이 합리적이다. 맹목적으로 관찰만하면안된다. Physics is not metaphysics. 물리학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다. 실재를 묘사한 그림이다. 모든 과학이 그렇다. 과학이론은 도구이지 신조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특이한 시각이다. 이 시각은 상상이상으로 놀라운 통찰을 준다.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를 그린 그림이다. 비유를 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이다.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실, 즉 사물을 묘사하는 논리적 사실그림이다. 물리학은 자연현상을 수학적 추상화를 통해 그린 그림이다. 실재 그 자체를 파악할수는 없다. 실체를 묘사하는 논리적 그림이 있을뿐이다. 현실의 그림자를 통해 합리적인 근사이론을 구축한다. 자연의 이면에 숨겨진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찾아낸다. 자연현상 이면에 숨겨진 보다 근본적인 이론체계를 만든다. 물리학은 기본적으로 예전의 이론체계의 개념적 틀안에서 발전한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고전역학적 개념(운동량, 에너지)등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이다. 경험적,실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귀납적 추론을 통해 가설을 만들고 연역적 형식으로 이론체계를 만든다. 이러한 논증방식을 귀추적(abductive)또는 실험적 연역법이라고 한다. ☆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1. 내용은 경험적,실험적으로 증명가능한 것이고 2. 형식은 공리체계를 통해 연역적이고 수학적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3. 가장 간단한 원리로부터 가능한 모든현상을 설명하는 환원주의적 방식을 사용한다. 즉 오컴의 면도날 법칙을 따른다. 4. 이를 바탕으로 자연 현상에 대한 추상적 이론체계를 통해 자연현상을 기술한다. 이론체계는 수학적으로 간결하고 우아할수록 좋다. 이러한 이론체계는 자연현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축한 이론일 뿐이며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를 그린 그림이다. 실험적 검증에서는 반복적으로 동일한 조건에서 같은 결과를 내야한다.(과학실험의 재현가능성)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대한 진리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자. 그림은 수학적으로 간결하고 우아한 것일수록 좋다. (예컨데 코페르니쿠스의 행성모델) 이것이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이다. 물리학 이론은 실재와 우리의 인식사이의 연결고리이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결합으로도 볼 수있다. 귀납과 연역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이론을 구축한다. 뉴턴역학의 공리도 귀납을통해 유추한 것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고 유클리드 기하학의 제5 공리 평행선 공리가 수정되었듯, 일반상대성이론이 나오고 뉴턴의 중력이론이 수정되어 공리가 수정되듯 실험적인 사실에 비추어 적절히 공리를 수정해줘야한다. 노이라트의 정합론에 대한 배를 수리하며 항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완전한 연역은 없으며 반드시 귀납의 영향을 받는다. 뉴턴역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을때도 비슷한 과정이 일어났다. 연역법에서의 공리는 출발점이기 이전에 도착점이다. 개별사례에서도 성립하게끔 일반화원리 즉 공리를 적절히 의도적으로 정해준 것이다. "출발점이기 이전에 도착점" 이라는 문장을 곱씹어보길 바란다. 이러한 것을 귀추적(abductive)이라고 한다. 뉴턴도 프린키피아에서 이러한 철학적 관점을 시사하였다. Hypotheses non fingo 실험결과를 설명하는 가설을 만들고 연역체계로 작성한다. 올바른 예측과 실험사실이 가설의 정당성을 보증한다. 우리는 어떠한 물리학 이론체계가 틀렸음을 확신할 수있지만 결코 완전히 옳음을 확신할수는 없다. 어떤 이론에 반하는 관찰자료가 없고 올바른 예측을 할 때 우리는 근사적으로 옳다고 여길것이다. There is a theory which states that if ever anyone discovers exactly what the Universe is for and why it is here, it will instantly disappear and be replaced by something even more bizarre and inexplicable. There is another theory which states that this has already happened. – Douglas Adams